그곳에 서면 바로 빛이 된다

2007-05-22      
아름다운 등대 기행
매일 저녁 7시 우리나라 해안가는 희미한 불빛을 밝힌다. 주인공은 등대다. 누가 사연을 만드는 건지 등대지기의 노래는 서글프다. 외로움 때문일까. 더욱더 사연이 궁금해진다. 등대는 사람이 모인 육지를 바라 볼 수가 없다. 외롭게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듯하다. 육지의 끝을 알리는 등대를 찾아 나서보자.



동해안 호미곶 등대

청일전쟁 시절에는 주 전장이었던 서해안에 등대시설이 없었다. 조선의 주권이 나름대로 확보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제가 서해안에 등대를 설치할 여력도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시기 즉 20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일제는 이미 한반도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곳곳에 등대를 설치하여 제국주의 침략의 불빛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1905년, 이제 남은 적은 러시아뿐이었다. 동해가 주 전장이 되면서 발틱 함대를 제압하기 위해 일본해군이 시시각각 동해로 모여들었다. 발틱 함대는 먼 외해를 돌고 돌아 한반도의 동해안으로 접어들었다. 일본 해군으로서는 사정이 급했다. 곳곳에 목조 등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독도에도 목조 등대를 설치했다. 임시방편이었던 셈이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일본은 이들 목조 등대가 있던 곳에 콘크리트등대를 만들기 시작한다. 곳곳에 등대가 들어섰다. 울기등대도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다. 울기라는 이름 자체도 일본식 표기이다.

자갈밭을 사각사각 걸어가자면 양쪽으로 울창한 소나무숲이 바닷바람에 솔냄새를 쏟아낸다. 울기등대로 가는 길은 소나무숲길 그 자체이다. 왜적의 침입이 일상적이었던 울산 일대는 예로부터 적을 방비하는 요충지였으니 곳곳에 말을 기르던 국영목장이 산재한다. 조선후기의 목장지(牧場誌)에 의하면 오늘날의 울기등대가 위치한 일산진(日山津)이 “관기(官基) 남쪽 15리에 있다. 북쪽으로 울산부가 30리 거리이고, 좌병영이 30리 거리이다. 앞은 큰 바다이다. 동쪽에 어풍대(御風臺)가 있다” 고 했다.

일제가 들어오면서 국영목장 지대를 파하고 이곳에 해군기지를 설치한다. 울기라는 명칭의 기(崎) 자체가 일본 나가사키(長崎)·미야자키(宮崎)처럼 우리식으로 따지자면 곶(串)에 해당된다. 즉 울기란 말은 일본인들이 일본식으로 지은 명칭일 것이다. 러일전쟁 시기 동해 연변에서 발틱함대를 침몰시킨 일본해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 해군부대를 설치한다. 울기등대는 그 앞에 날카로운 암초군인 일명 대왕암을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울기등대가 서 있는 곶을 차단하면 이 일대는 천혜의 전략적 기지가 되는 셈이다.

일제는 이곳을 차지하고 인공적으로 1만5000여그루의 해송림을 조성했다. 등대 자체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인데다가 해군이 주둔하였던 까닭
에 이곳 해송림은 오랫동안 민간인이 들어설 수 없는 일종의 군사기지였다. 덕분에 해송림은 비교적 잘 보호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숲이 너무 웃자라 등대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나무를 자르는 것도 한도가 있지, 매년 소나무 자르는 일로 세월을 보냈지요” 웃자라는 소나무 때문에 등대원들의 고충이 여간 아니었던 듯 싶다. 급기야 소나무에 가려져 등대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등대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구등대가 위치한 곳에서 50m 해변쪽으로 옮겨 1987년 12월 촛대모양의 등대를 새로 건립한다.

구등탑을 잘 보존하고 신등탑을 세운 전략은 대단히 올바른 것이다. 아깝게도 구등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신등탑을 세운 곳이 즐비한데, 울기등대는 신구 등탑이 조화롭게 마주 보면서 전통과 현대의 공존, 실용과 근대문화유산의 조화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 신등탑을 세우면 으레 구등탑은 부수거나 원형을 왜곡시키는 전례에 비추어 참으로 잘한 선택일 것이다. 신등탑도 높이만 높게 솟았지 건축물의 조형양식은 구등대의 원형을 십분 살려서 지었기 때문에 양자의 조화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소나무숲에 거대한 탑들이 마주보고 서 있어 숲속의 성인인양 의롭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서해안 홍도 등대

서해안시대를 선포한 ‘서해안고속도로’ 완공, 그리고 KTX로 연결되는 목포, 게다가 무안국제공항이 완공되면 목포는 한결 가까워진다. 남서해안의 관문 중의 관문인 목포항에 가면 전라남도가 거느린 무수한 섬들로 떠나는 배들이 시간을 다투면서 기다리고 있다. 홍도와 흑산도 뱃길도 그 중의 하나이다.

목포는 어느 영화제목처럼 당연히 항구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이 목포항만큼 부각되는 곳은 없다. 가령, ‘마산은 항구다’, ‘속초는 항구다’라고 하였을 때, 그 감흥이 ‘목포는 항구다’에 비하여 떨어진다. 어딘들 항구 아닌 곳이 없으련만, 목포는 역시 항구다. 점점이 흩어진 다도해로 삶의 애환을 실은 연락선들이 오고 가는 종점이기 때문이다. 그 섬들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이었다. 홍도로
가는 길목의 비금도, 도초도, 흑산도가 또한 그러하다.

연간 10만명이 넘는 숱한 사람들이 홍도로 몰려온다. 이 조그마한 섬에 그만한 숫자는 엄청난 것이다. 점차 방문객이 늘어나고 있다. 홍도는 가히 ‘국민관광지’로 손꼽히며, 서남해안 관광의 1번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홍도에 뛰어난 등대가 비경처럼 숨어있다. 국민관광지에서 볼거리
가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그 등대를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다.

홍도등대의 불빛은 20초에 3번 빤짝인다. 무려 45km 떨어진 곳까지 불빛을 전달한다. 등탑은 불과 10여 m 높이이나 워낙 높은 곳에 세워져서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홍도등대는 그 자체가 명품이다. 보통의 원주형 등탑과 달리 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건축가의 섬세한 설계와 시공이 돋보여서 귀공자가 서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등탑 내부의 주물로 만든 층계도 등대 창건 당시 그대로여서 75년 넘는 세월을 버텨왔다.

75년, 간단한 세월이 아니다. 바닷바람에 벽면이 부식되었을 법한데 워낙 튼실하게 지어졌기에 지금도 끄떡없이 이용되고 있다.

등대 옆에는 사무동과 기계실을 새로 지었다. 2층에 오르면 사무동이 바다를 향해 있으며 그 옆에 안개에 쓰이는 무연 사이렌이 있다. 전기 사이
렌이 아니라 전통적인 에어 사이렌 나발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그 곳에서 바다를 굽어보면 등대 아래의 낭떠러지로 두여, 긴여, 탑여, 높은여, 독립문바위, 아랫녀 등 암초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보기에는 아름다운 바위들이지만 선박에는 암초에 지나지 않는다.

낡은 관사를 부수고 새 관사를 여러동 지었다. 시설이 훌륭하다. 4개의 관사 중에서 2호 관사는 체험숙소로 개방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공모에 당선된 이들이 하룻밤 자면서 등대체험을 하는데 어디나 그렇듯이 이곳도 경쟁이 보통 심하지 않다. 등대에서 하룻밤,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아침녘에 일어나 홍도의 일출을 마중하는 것도 또 다른 멋이다.

관사 뒤쪽으로 병풍처럼 바위들이 두르고 있다. 동백나무가 곳곳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홍도는 소나무도 대단히 뛰어나다. 해송이 아니라 붉은 우리 소나무가 바람을 맞으면서 누은 키로 수줍은 듯, 그러나 강인한 골격으로 자라고 있다. 항로표지원의 설명으로는 예전에는 등대에서 밤에 불을 밝히다보면 풍란의 그윽한 냄새가 번져왔다고 한다. 홍도 곳곳이 모두 풍란의 자생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하나 둘 사람의 손길을 타면서 풍란은 커녕 나무 등걸조차 사라졌다. 천연기념물 보존지역으로 묶이고 난 다음에 조금씩 원형을 회복해 가고 있는 중이다.

홍도에는 향기가 10리까지 풍긴다는 대엽풍란 등 274종의 희귀식물, 그리고 230여종의 동물이 살고 있다. 1965년 섬 전체를 천연기념물 170호로 지정하였으며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절대 보호구역인 만큼 함부로 채취하는 것을 엄금하고 있다. 다행히 선착장에 홍도자생란 전시장을 만들어놓았으므로 거기서 다양한 난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염가로 판매하기도 한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적송, 잣밤나무, 줄향나무 등 상록수가 많다.


남해안 거문도 등대

거문도에 가면 고풍스런 영국군 묘지가 있다. 왜 우리나라의 머나먼 섬에 영국군의 묘지가 있을까. 머나먼 이국땅에 묻힌 이들 영국인들은 한때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주의의 역사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영국은 거문도를 해밀턴섬이라고 명명하고 1885년 4월 중순 느닷없이 조선 정부의 허가도 없이 무단 점거한다. 이 사건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 간 대립이 바야흐로 한반도에서도 펼쳐진 것이다.

19세기는 국제관계사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남진하는 쟈르 러시아와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싸움이 한반도 거문도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러시아의 부동항 획득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것이란 통설과 다르게 영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측면도 있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판데(Pandjeh)를 침공하여 인도로 가는 통로를 위협하는 극도의 긴장된 조
건에서 영국이 러시아 남하를 핑계 삼아 선수를 친 것이다.

실제로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무단 점거할 것이란 소문은 동아시아지역의 개항장인 홍콩·상하이·요코하마·나가사키 등지에서 파다한 소문으로 번져 있었다. 소문은 현실로 드러났다. 영국내각은 홍콩 주둔 영국함대에 긴급 훈령을 내려 보내고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 중인 군함을 출동시켜 거문도 내항으로 진입시킨다. 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봉쇄작전이 시작된 것이니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목줄을 쥐려는 의도에서 벌어진 작전이
었다. 우리의 바다에서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벌어진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1885년 4월 26일 1차로 거문도 내항에 진입한 군함 3척의 승무원은 무려 617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중국주둔 함대에서 속속 진입하여 군함 13척에 총병력 2000명을 상회하였다. 이들 해군은 내항에 목책을 설치하여 러시아의 진입을 막는 한편 상륙부대가 사용할 해병대용 막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거문도에 영국기가 펄럭였으며, 병사들은 포대와 병영을 쌓아 요새화 구축에 들어갔다. 섬 주위에 수뢰(水雷)를 부설하고 수로와 전선을 가설한다. 3개의 항만 출입구에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6개처에 포대를 가설하였다. 막사건축과 해안축조는 거문도 주민을 동원하고 용역을 받
은 미국 건축업자가 중국인 목수와 미장이를 대동하여 만들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수많은 남해안 섬 중에서 하필이면 거문도를 주목했을까.

거문도를 가다보면 초도·손죽도 등이 펼쳐져 있어 거문도가 다도해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해안과 제주도의 중간해역이자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간의 해상통로이며, 러시아 동양함대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서구열강은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 거문도가 적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지형적으로도 군항에 안성맞춤이었다.

거문도는 고도, 동도, 서도 세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운데에 고도(현재의 거문리)가 버티고 있어 본디 삼산도(三山島)라 불렸다. 아늑한 만이 요새처럼 숨어 있어 대형 군항으로는 부족한 크기지만 중간 연락항으로는 그만이다. 서도·고도로 둘러싸인 내해는 언제나 파도가 잔잔하고 간조 때에도 수심이 14~16m 유지되는 천연의 양항이다. 영국이 욕심을 낸 이유를 알 만하다.

영국이 떠난 자리에 훗날 일본이 들어온다. 일제식민지가 시작되면서 이번에는 일본 어민들이 대거 거문도를 주목한다. 거문도의 일본과의 인연은 이미 임진왜란으로 소급된다. 삼산면 손죽리에는 이대원 (李大元.1566~ 1587)사당이 있다. 예전에 섬에서 초가로 사당을 짓고 배향해 오다가 지금 건물은 1983년에 여천군에서 지은 것이다. 이대원은 흥양현 녹도만호(鹿島萬戶)를 지냈는데 왜구가 침입하자 대파하였으나 그가 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이 무리하게 출전을 요구하여 나가 싸우다가 왜구에 잡혀 순절한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조정은 심암을 파직 압송하여 처형한다. 충무공 이순신도 큰 인물을 잃어 크게 손실을 보았다고 슬퍼하며 손대도(損大島)라 명명한 것이 뒤에 손죽도(巽竹島)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한국관광공사의 세상 가장아름다운 시그널 등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