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운양호 사건 때 파괴 ‘아픈 역사’
2007-05-23
사적 제225호 -초지진(草芝鎭)
1871년(고종(高宗)8) 4월 23일 미국의 로저스 제독(提督)이 지휘하는 극동 함대가 콜로라도호(號)를 비롯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군사적 행동을 한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모노카시호(號)와 팔로스호(號)등의 함포지원 아래 킴벌레이 중령(中領)이 미국 해병 450명을 이끌고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전을 감행하자, 이곳 초지진의 수비대가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해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됐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문의 대포 역시 파괴되거나, 강화 해협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양요가 끝나자 다시 원상대로 복구됐다.
1875년에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파견한 운양호(雲揚號)가 또 다시 공격했다. 8월 21일 운양호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정박하고, 함장 이노우에가 단정을 내려 담수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해 왔다. 이에 미군의 침략으로 쓰라린 경험을 했던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양호는 110mm와 40mm 함포로 포격을 해와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m 정도의 2인치 대완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진(廢鎭)되었고,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