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증상 동반하는 ‘우울증’

한국문화 특유의 분노증후군 ‘화병’

2011-05-03     최은서 기자

화가 날 경우 보통 ‘화가 치민다’고 표현한다. 마치 뚜껑을 덮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끓일 때 압력이 팽창해 물이 넘치는 것처럼 화도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 의사들은 화병을 우리의 고유한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파악한다. 서양이 감정을 표현하는 문화인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감정의 절제’를 높이 사는 ‘억압문화’이다 보니 화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울화를 적절하게 표출하는 방법을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화병에 대해 알아본다.

화병은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이다. 우울감, 식욕 저하, 불면 등의 우울 증상 외에도 호흡 곤란, 심계항진, 몸 전체의 통증,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 등의 신체 증상이 동반되어 나타난다. 화병은 환자가 자신의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고, 그 억압된 분노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병 증상 진행과정

화병은 충격기, 갈등기, 체념기, 증상기의 단계를 밟아 진행된다.

■ 충격기
화가 날, 충격을 받은 급성기를 말한다. 이때는 ‘화’라기 보다 격한 분노로 표현함이 옳다. 상대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 등이 분노에 앞서 격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심지어 살의까지도 품게 되는 극한의 감정 상태다.
이러한 분노를 처리하는 데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여 때로는 파괴적으로도 된다. 나아가서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 이런 표현파는 가족이나 친지들도 동원하는 등 부산을 떨기도 한다.
둘째, 감정의 표현이 직선적이지 못 하고 억지로 병원에 실려와도 모든 걸 덮어 두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때문에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도 소극적이다.

■ 갈등기
급성 충격기를 지나 격한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이성을 회복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갈등기에서는 체면을 중시하고, 또 사회윤리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감히 이혼할 수는 없다.
그래서 괴로워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고 화가 해소된 것도 아니고, 화날 일이 해결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이러한 시기에 전형적인 불안증이 나타난다.

■ 체념기
이 시기가 되면 환자들은 근본적인 문제해결보다는 차츰 자신의 불행을 그런 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된다. 즉 운명이다, 팔자소관이다 등으로 자기의 불행을 초자연에 투사함으로써 화를 중화시키는 체념 상태로 된다. 그렇다고 상대를 용서하는 그러한 관용은 잘 볼 수 없고, 다만 체념을 통해 감정적 관계를 맺지 않는 상태로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감정의 억제도 강력히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억제와 체념의 기전이 잘 성립되면 마치 환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되며, 우울증에 빠진 사람 같아 보인다. 체념이란 심리기제는 격한 감정을 중화시켜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게 할 수 있는 유용한 방어기제이다.

■ 증상기
이 시기는 신체적인 증상을 호소 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억제와 체념으로만 쌓인 화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자체가 스트레스로 되어 만성 스트레스 반응의 형태로서 신체적 증상이 생긴다. 또 다른 기전으로서는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커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땐 이를 신체로 투사하여 ‘마음의 고통은 곧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정신기제에도 연유한다.
따라서 체념기에 들어오면서 우울증이 차츰 현저하다가도 신체화 과정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우울증이 호전되는 경향은 흥미롭다. 즉 신체화는 환자로 하여금 더 심각한 우울증으로 빠지지 않게끔 하는 방어 작용이 있다.
치료약물 치료나 정신 치료를 통해서 화병을 치료할 수 있으며, 두 가지 치료 방법을 동시에 적용할 수도 있다.


치료

약물 치료는 항우울제가 주로 사용되며, 뇌세포의 연결 부위인 시냅스에서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차단시키는 약물들이 우선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세로토닌 외에도 노르에피네프린이나 도파민 등에 작용하는 항우울제 역시 치료 효과가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환계 항우울제 등은 신체 증상에 우수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항우울제는 약물에 따른 효과나 부작용을 고려하여 각각의 환자에게 보다 우수한 결과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약제를 선택하게 된다. 항우울제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2~3주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충분한 기간, 충분한 용량을 사용했는데도 반응이 충분하지 못하다면 다른 약제로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권장된다. 증상이 호전되더라도 재발을 막기 위해 수개월 이상 치료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신 치료의 경우는 증상 자체를 조절한다기보다는 환자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대인관계, 성격 등의 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치료법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눈에 띄게 증상이 회복되기보다는 장기간의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정신 치료의 경우에도 그 치료법에 따라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문제가 다르며, 기법에 따라 면담 횟수나 기간 등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처음부터 약물 치료와 병행해서 시행할 수 있고, 약물 치료를 통해 증상이 호전되었으나 환경적인 문제가 지속되는 경우에도 정신 치료를 적용할 수 있다. 또한 증상이 심하지 않은 경우는 약물 치료 없이 정신 치료만을 받는 경우도 있으나,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약물 치료를 기본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방방법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운동 등이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줄 수 있으며, 취미 생활 역시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는 것 역시 증상을 악화시킬 수가 있으므로 가족이나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 또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대인관계 등의 스트레스가 장기간 지속되거나 스스로가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정신 치료를 통해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병의 초기에 치료를 시작해서 악화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다. 항우울제를 통한 약물 치료는 우울감 등의 증상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호전시킬 수 있으며, 동반된 신체 증상 역시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