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잠자는 용, 승천도 가능하다
2007-09-05 김승현
경선이 끝난 지 보름여가 지났지만 내홍은 여전하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껴안기’에 본격 나섰지만 상황이 순탄치 않다. 이 달 안으로 선대위를 출범시킬 계획인 이 후보측은 친박인사를 끌어들이지 않는 한 ‘절반의 승리’에 그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지난달 말 전남 구례에서 열린 당 연찬회에도 친박 인사들 상당수는 불참했다. 양측 핵심인사들이 모여 화합을 모색하는 자리도 가졌지만 여전히 가시 돋힌 설전으로 평행선 관계는 계속됐다.
박 전대표가 여러 차례 백의종군을 통한 ‘경선 승복’ 의사를 천명했지만 정작 캠프 내부 분위기는 다르다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경선 이후에도 숨가쁘게 진행되는 양 진영의 물밑 싸움을 추적했다.
잠든 용을 깨우는 것은 위험하다. 하물며 잠든 척하는 용은 더욱 그렇다.
이명박 후보는 최근 박 전대표와의 화합 문제와 관련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지만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은 깨울 수 있다”며 “그 때 가서 깨우겠다”고 언급했다.
한편으로는 화합의 손을 내밀고 있지만 속내는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의사 표시였다. 박 전대표측의 최근 행보가 ‘승복하는 척’만 하고 있을 뿐 실제 내부 기류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자는 척 하는 사람들”
이 후보측 관계자는 “감정의 골이 깊은 만큼 일단 시간이 흐른 뒤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달라”고 확대해석을 일축했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이 후보도 “경선 과정에서 다시 못 볼 것 같은 발언들을 서로 해서 쑥쓰러울 뿐”이라며 양측의 간극을 재확인했다. 해결의 전제 조건으로 “정권 교체를 향한
순수한 마음만 있다면 된다”며 의미심장한 말도 덧붙였다.
캠프 내 좌장인 이재오 최고위원은 경선 기간 보여줬던 말과 행동에 대해 박 전대표측이 반성해야 한다고 파열음을 내기도 했다.
이 후보측은 공식적으로는 대포용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친박 진영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못미덥다는 분위기다.
최근 전남구례에서 열린 당 연찬회에 친박 인사 상당수가 불참한 것을 놓고도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는다. 캠프 내 핵심 인사는 “박 전대표야 그렇다 쳐도 벌써부터 이렇게 안 도와 주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아직은 노력 부족”
이 후보측은 이미 몇 가지 조치를 통해 당 화합 메시지를 충분히 전했다고 자평한다.
후보 비서실장에 중립을 표방했던 임태희 의원을 내정한 것도 그 단적인 예라는 것이다.
새로 선출된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이 후보의 대표 대선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구상의 수정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당내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많이 양보했다는 것.
하지만 친박 진영 인사들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한 관계자는 “일단 정기 국회까지는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게 전체적인 분위기”라며 “이 후보측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도 그 때 가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 후보측의 대응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박 전대표측의 선대위원장직 수용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안팎에선 ‘반쪽 한나라당’에 대한 우려감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박 전 대표측이 경선 무효 서명 운동을 적극 추진 중인 강경 그룹을 적극적으로 진정시키는 모습도 안 보이는 데다 이 후보 또한 친박 인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가시적 움직임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시·도당 선거 ‘분수령’
일단 친박 진영은 경선 결과 승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보가 향후 본선 과정에서 지지율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중도 하차’ 가능성이 상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박 전 대표는 경선 막판 이 후보를 겨냥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대선 필패론’을 주장했었다. 친박 진영에서 활동했던 관계자는 “우리가 왜 그런 주장을 펼쳤는지 분명히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며 “아직도 남은 뇌관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 후보와 친박 진영의 세대결은 향후 당내 쇄신 작업과 구조 조정을 통해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이 후보가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기는 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립 구도는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이 후보 측에선 대선 기간 박 전 대표가 당권을 접수할 가능성이 높다며 아예 초기부터 무력화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향후 있을 16개 시, 도당 위원장 선거는 내년 총선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측 전쟁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차라리 정치 은퇴”
몇가지 안을 갖고 숙고 중인 박 전대표측은 현재 다양한 카드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라당 탈당과 같은 강수도 경우의 수에 놓고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편에서는 이회창 전총재와의 연대를 통해 이 후보를 압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금처럼 소극적인 모습으로 대선 끝까지 가자는 주장도 존재한다.
일부 관계자들은 절대로 이 후보에 대한 지원은 없을 것이라며 정치 은퇴 불사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현재 친박 인사들은 박 전대표가 활동을 재개하는 시점까지 개인 목소리를 최대한 자제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이 후보측으로선 다분히 ‘잠든 척 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 하다.
하지만 내년 총선을 고려할 때 박 전대표측이 깊이 잠들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후보와 깨어있는 친박진영의 싸움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의지 불태우는 ‘박의 남자들’
지난 달 27일 서울에서 열린 박근혜 전대표의 캠프 해단식은 이별이 장이 아닌 새로운 의기투합의 장에 가까웠다.
안병훈 선대위원장은 “당원과 대의원, 선거인단의 투표에서는 이기고 여론조사에서 패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놓고 밤잠을 제대로 못잤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이어 “제가 선택한 일, 그 선택이 지금도 옳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에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박 전대표가 이루려는 큰뜻은 계속 이어가
야 한다”고 말했다.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도 “강철 같은 의지의 상징으로, 빛나는 희망으로 박근혜라는 이름을 모두의 가슴에 간직하자”며 “꿈은 이뤄질 것”이라고 의미심장
한 발언을 남겼다.
서청원 상임고문은 이재오 최고위원을 겨냥 “안하무인, 기고만장한 사람들은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맹비난하며 “승리는 인정하지만 도덕성 문제는 본인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적극 두둔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자리에 참석했던 서울의 모 당직자는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게 대세였다”며 “새로운 신호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MB 본격 견제 들어간 ‘북한’
한나라당 경선 이후 관련 보도를 자제해 왔던 북한 언론이 지난달 말부터 거세게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 민족끼리’는 최근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 놀음은 권력에 미친 자들이 벌인 싸움질의 한 토막에 불과하다”며 “리명박은 지금 쑥대 위에 올라선 민충이 마냥 기고만장해 있다”고 맹비난한 통일신보 최근호의 글을 소개했다.
통일 신보는 이에 앞서 풍자시를 통해 이 후보와 박근혜 전대표의 검증 공방을 ‘개와 고양이의 싸움’에 비유하며 “참말로 가관”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리민족끼리’는 이 후보가 김영삼 전대통령을 예방한 것과 관련 이 후보를 ‘반통일·반북대결 분자’라고 규정하며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북한 언론의 대 MB 공격은 10월초 2차 남북정상회담과 맞물려 대선 정국에서 새로운 전선을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는 “예전처럼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극도로 냉각되면 위기감이 조성될 수도 있다”며 “이 후보가 대북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가 변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