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승부사 박근혜 ‘빨간 상의의 비밀’
‘마지막 48시간’에 승부수 걸었다
2006-07-20 황태순 정치평론가
강재섭의 충성맹세
“50석도 못 얻는다고 했을 때 천막당사에서 당을 구한 박근혜 전대표께 경의의 박수를 보냅니다.”7월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장.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강재섭 의원은 박근혜 전대표에 대한 일종의 ‘충성맹세’로 수락연설을 시작했다. 물론 이명박 전시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당초 대권을 염두에 두고 있던 강재섭 의원은 마지막 순간 당권으로 돌아섰다. 뒤늦게 경선에 참여한 강 의원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오래 전부터 당권을 준비해 온 이재오 후보에게 계속 밀렸다. 유력한 대권주자인 이명박 전시장은 이재오 후보를 지원하고 있었다. 퇴임을 앞둔 이명박 시장은 인터뷰를 통해 “개혁적 인물이 대표가 돼야 한다”며 이재오 후보를 노골적으로 밀었다. 오래전부터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 경선은 결국 ‘박근혜 대 이명박’의 대리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시장이 공개적으로 이재오 후보를 지원해도 박근혜 전대표측은 움직이지 않았다.
박 전대표측은 엄정중립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 전대표의 측근인 유승민 의원 정도가 개별적으로 강재섭 후보를 지원할 뿐이었다. 유 의원은 강 후보의 경북고 후배다. 다급해진 것은 강재섭 후보였다. 7월9일 한나라당 기자실. 강재섭 후보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강 후보는 “이명박 전시장이 사조직을 전국적으로 동원하고 당원협의회 위원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등 이재오 후보를 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당권을 이재오 후보가 아니라 이 전시장과 다투는 느낌”이라고 이 전시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강 후보가 이 전시장측과 분명하게 각을 세우면서 박근혜 전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SOS를 친 것이다.
그러자 박근혜 전대표 진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재섭 후보의 기자회견이 끝나기 무섭게 박근혜 전대표 측은 “박 전대표가 이 전시장이 너무 개입한다는 보고에 ‘이렇게 하면 어떻게 공정경선이 되겠느냐.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흔들릴까 걱정이다’라고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명박 전시장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경선에 개입한다는 분명한 명분을 세우며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박근혜-이명박의 대리전이 본격화되는 순간이다.
냉철한 승부사 기질 발휘
2007년 대선까지는 아직도 1년6개월이나 남아 있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대권주자들로서는 무엇보다 확실하게 당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이번 전당대회는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승부처였다. 이명박 시장은 이재오 의원을 통해 당을 장악하려고 했다. 박근혜 전대표나 강재섭 대표는 이른바 ‘본류TK’다. 박 전대표를 TK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이론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정치적 고향은 대구 달성이고, 대구·경북이 최대 지지기반이다.반면, 이명박 전시장과 이재오 의원은 ‘변방 TK’다. ’6·3동지회’ 멤버로 남다른 유대감도 있다. 더욱이 이재오 의원은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직인수위원장을 맡았던 당내 ‘MB(이명박 시장)’계보의 맏형이다.
지난해까지 이재오 의원은 박근혜 전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르며 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사학법 파동 이후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는 손발을 잘 맞춰 왔다. 이재오 원내대표 스스로도 반년 가까이 박근혜 대표를 지극정성으로 보좌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근혜 전대표는 ‘냉철한 승부사’다. 이명박 전시장 측에서 공공연히 이재오 후보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때를 기다렸다. 자신들이 개입할 적절한 시점을 기다리며 차분하게 명분을 축적했다. 그리고 한때는 대권주자의 반열에 함께 섰던 강재섭 의원이 확실하게 ‘충성맹세’를 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대권행보를 위해 절대 필요한 강재섭 의원이지만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지난 6월 초, 한 고위당직자가 박 대표에게 박근혜 대권후보로 가자면 당권은 이명박 시장 쪽에 양보하는 것이 순리라고 설득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근혜 대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무슨 그런 논리가 있습니까?”라며 면박을 줬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의 대권시나리오에 처음부터 ‘이재오 체제’는 없었던 것이다. 선거에는 ‘마지막 48시간’이 있다. 어떤 선거든 마지막 이틀을 잘 지키지 못하면 뒤집어지기 일쑤이다.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을 때 그 파괴력은 배가된다. 박근혜 전대표 측에서는 ‘마지막 48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강재섭 후보의 역전승을 통해 박근혜 전대표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준 것이다.
전략과 진술서 모두 앞서
모든 싸움에는 어차피 상대가 있는 법이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서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여권의 대선 전략은 ‘한나라당 대 반(反) 한나라당’ 구도다. 양극화 논리를 앞세워 양자대결 구도로 대선을 치르려 한다. 지역적으로는 ‘영남권 고립’ 전략이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는 한나라당 입장에서의 선택은 오히려 분명해진다.
박근혜 전대표는 이 같은 상황을 꿰뚫어 본 것이다. 여권이 범민주개혁세력의 결집을 부르짖고 있는 마당에 어설프게 따라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간파했다. 산토끼를 잡기보다는 집토끼를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한 때라고 본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전대표측은 전략과 전술 모두에서 이명박 전시장 측을 압도했다. 박 전대표 진영은 우선 ‘강재섭-강창희’ 라인을 묶었다. 충청권 단일후보로 나선 강창희 전의원의 영향력을 백분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나라당 관계자에 따르면 7월9일을 전후해 충청권에서 강재섭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대구·경북권에서 강창희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갔다.
또 이명박 전시장측이 지역당원협의회 위원장들을 집중 공략한데 비해 박 전대표 진영은 당 소속 시장·군수들에게 공을 들였다. 이번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싹쓸이 바람과 박근혜 대표의 위력을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는 시장·군수들은 분명하게 줄을 섰다고 한다. 7월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장. 흰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 명의 청년 지지자들이 열정적으로 “강재섭”을 연호하고 있었다. 이들 청년 대부분이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멤버들이라는 후문이 파다하다.연설시작 20분 전쯤 박근혜 전대표가 대회장에 들어섰다. 단상의 고위당직자석에 앉아 있는 이명박 전시장과 달리 박 전대표는 대의원석을 돌며 일일이 악수를 하고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날 따라 박 전대표가 차려입은 빨간색 상의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대의원들 사이에는 ”박 대표 악수 한 번에 강재섭 한 표“라고 말이 돌기 시작했다. 여덟 명 후보자가 마지막 7분 연설을 시작했다. 강재섭 후보가 첫 번째 연사로 나섰다. 마지막으로 연설에 나선 이재오 후보가 연설을 시작한 지 3분쯤 되었을 때 박근혜 전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회본부가 박 전대표에게 곧 시작될 투표에 앞서 미리 단상 쪽으로 와 줄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장내가 일순 술렁이면서 분위기가 산만해졌다. 이로써 전당대회장에서의 승부는 결판이 난 것이다. 박근혜 전대표 진영이 경선에 개입하는 데는 이재오 후보의 전략적 미스도 있었다. 7월9일 강재섭 후보가 ‘대리전’으로 전선을 확대하려고 했을 때 이를 바로 차단했어야 했다. “강재섭 후보가 대리전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래 대리전으로 한번 해보자’는 선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손학규의 블루오션 전략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틀 후인 7월13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대권주자 대리전 논란’과 관련해서 박근혜 전대표와 이명박 전시장을 싸잡아 비판했다. 이 전총재는 이명박 전시장에 대해 “처음에 개혁적 인물 운운하면서 특정인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단초가 됐다.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전대표에 대해서는 “전대 대회장에서 이재오 후보가 연설하는 도중 자리를 옮겨 연설을 방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다”며 박 전대표가 이재오 최고위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정당은 인물중심의 정당이다. 현재 한나라당만 보더라도 전두환의 민정당이 노태우의 민자당으로 또 김영삼의 신한국당으로, 총재가 바뀔 때마다 함께 변해왔다. 지금의 한나라당도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이회창 총재가 조순 총재의 민주당과 합당해 만든 당이다. 2002년 대선 패배 후 이회창 총재는 정계를 떠났으나 여전히 한나라당 곳곳에 이회창의 숨결이 배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때 이회창 총재와 각을 세우며 한나라당을 떠났다가 다시 복당한 박근혜 의원은 2004년 3월 한나라당의 대표로 취임했다.
그로부터 2년 4개월이 지났다. 이제 한나라당은 더 이상 이회창의 한나라당이 아니라 박근혜의 한나라당이 됐다. 오는 26일 치러지는 보궐선거에서 이회창 전총재측에서는 서울 송파에 측근인 이흥주 전특보의 공천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정인봉 전의원을 공천했다가 취소하고 다시 맹형규 전의원을 공천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지만 이회창 전총재의 속이 좋을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회창 전총재는 박근혜·이명박 두 대선주자를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더 이상 ‘이회창의 한나라당’이 아니라는 데 대한 좌절감이라고나 할까? 7월 11일 전당대회장에 손학규 전경기도지사는 수염도 깎지 않은 텁수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사직에서 물러난 뒤 ‘100일 민생탐방’ 도중 투표를 위해 나타난 것이다. 기가 막힌 연출이다. 당내에 자파 세력이 취약한 손 전지사는 새로운 영역, 즉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있다.
당내에서 박근혜 전대표와 자웅을 겨루던 이명박 전시장은 대선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전당대회에서 패했다. 지금 당장은 이명박 전시장의 입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박근혜 전대표의 앞날도 순풍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명박·손학규 두 경쟁자에 비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콘텐츠’를 메워야 한다. 이명박에게는 청계천이, 손학규에게는 외자유치라는 구체적인 성과물이 있다. 박근혜 전대표가 고비마다 승부사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으나 아직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의 ‘강재섭 체제’는 당분간은 큰 무리 없이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오는 9월 정기국회가 끝나고 본격적인 대권구도가 펼쳐지면서 여권 내의 정계개편 소용돌이가 몰아치게 되면 또다시 내홍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모든 갈등의 요인들이 잠복할 때이기 때문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