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엑스포 유치 발로 뛴 ‘일등공신’
2007-12-05 박지영
여수엑스포 승전보가 울린 지난 11월 27일 새벽 5시 50분. 프랑스 파리에서 들려온 “여수 꼬레아” 소리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여수가 모로코 탕헤르를 제치고 2012년 세계 엑스포 유치에 성공하는 순간 누구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린 사나이가 있다. 바로 현대가의 맏형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이다. 이날 승리로 정 회장은 자신에게 명예회복 기회를 준 사법부와의 약속도 지키게 됐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한 ‘가문의 영광’도 이어가게 됐다. 그의 눈부신 활약상을 되짚어봤다.
2002년 12월 3일 유럽의 모나코. 전남 여수가 박람회 유치전에서 4차에 걸친 투표 끝에 중국 상하이에 고배를 마셨다. 국력과 외교력의 열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1996년 전남도 ‘건의’로부터 시작된 유치전은 6년간의 노력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여수시민들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여수시민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일어났다. 같은 달 14일 여수시민들은 ‘2012년 세계박람회 범시민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박람회 여수 유치를 국가계획으로 확정해 줄 것을 건의하는 운동을 펼쳤다. 지역민들의 상실감을 해소하고 지역개발에 대한 새 비전을 제시하자는 뜻이었다.
국가계획으로 확정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2004년 12월 14일. 이듬해 1월 전남도는 ‘지방유치위원회’를, 여수는 ‘여수시유치위원회’를, 해양수산부는 ‘유치기획단’을 설치했다. 이어 2006년 3월 국회는 유치지원특별위원회를,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
장으로 하는 정부지원위원회를 구성해 유치활동을 전격 지원키로 했다.
같은 해 5월 22일 정부는 박람회 유치신청서를 세계박람회기구에 냈다. 또 유치활동을 총괄하는 ‘2012여수세계박람회유치위원회’를 창립, 유치활동을 범국민적으로 펼쳤다. 이후 여수시민과 중앙·지방유치위원회, 정부, 재계 등은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전방위 유치전을 벌여왔다.
여수엑스포 ‘일등공신’
그중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활약상은 단연 눈에 띈다. 엑스포 명예유치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그룹 전체를 ‘여수엑스포 유치 비상체제’로 전환,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실제 정 회장은 ‘현대·기아자동차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라’고 긴급 지시한 반면 해외 각지의 탄탄한 딜러망을 ‘홍보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 칠순의 정 회장은 올해 4월부터 매월 한 번꼴로 여수엑스포 유치를 위한 해외출장길에 나서는 강행군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4월 슬로바키아·체코·터키 방문을 시작으로 6번의 출장길에 올랐다. 여기서 그는 슬로바키아와 체코를 각각 두 차례 다녀왔고 터키·브라질·프랑스·미국·캐나다· 러시아 등 8개국을 글로벌 현장 경영을 겸해 방문했다.
정 회장의 민간외교 활동은 주로 각국 정부 고위인사들을 만나 지지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최근 6개월 동안 그가 만난 총리급 이상 외국 인사만도 5명이나 된다. 또 장·차관급 인사는 90여명에 이른다. 70여개 국가 대사급 인사와도 수시로 접촉했다. 여수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정 회장이 밟은 대장정은 약 13만㎞. 지구(둘레 4만km)를 세 바퀴나 돈 셈이다.
이에 앞서 정 회장은 해외지역본부장들에게 회원국들의 표심을 파악하는 한편 부동층을 최대한 한국지지로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또 세계박람회기구 회원국 소속의 현대·기아차 대리점 사장단에게도 ‘여수엑스포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차 중아지역본부장 등에게는 “전세기를 타고서라도 아프리카를 훑으라”고도 강조했다. 이에 김종은 전무 등은 정 회장의 지시로 지난 10월 전세기를 빌려 중부아프리카 일대에서 유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때문에 정·관·재계에선 ‘정회장이 여수엑스포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뛴 모습은 유치여부를 떠나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물론 정 회장이 이렇게 총력을 기울인 데는 법원과의 약속이 크게 작용했다.
정 회장은 비자금 건으로 기소됐으나, 집행유예를 받아 구속을 피했다. 이 때 재판부는 여수엑스포 유치에 힘써줄 것을 정 회장에 당부했다. 당시 정 회장 또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정 회장의 이 같은 노력과 정부의 꾸준한 지원, 여수시민들 성원이 한데 어우러져 여수는 마침내 2차 투표까지 가는 피 말리는 접전 끝에 모로코 탕헤르를 제치고 유치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여수는 2012년 5월부터 석 달간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을 주제로 엑스포를 열어 세계적 관광도시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틀을 놓게 됐다. 예상경제효과만 14조원으로 전망된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거듭 실패하면서 상처받은 국민적 자존심을 추스를 수 있게 된 것도 무형의 수확이다.
세계 대회 유치 3관왕
한편 여수엑스포 유치가 결정되면서 지구촌 3대 축제와 현대가(家) 인연이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이 올림픽·월드컵 등 세계 ‘빅3 이벤트’를 여는 데는 현대가 사람들이 언제나 일등공신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현대가는 ‘민간외교의 강자’란 전통을 이어가게 됐다.
현대가의 ‘트리플 크라운’ 도전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981년 9월 30일 오후 2시 독일 남서부 바덴바덴에서 ‘기적’을 일궈냈다. 그때 정부는 물론 일반국민들도 정 명예회장이 88올림픽을 서울로 가져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최종투표에서 서울은 압도적인 표차로 일본 나고야를 침몰시켰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96년 아들 정몽준 의원이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에 성공했다. 국제축구연맹 부회장과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정 의원 역시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판세를 특유의 뚝심으로 역전시켜 ‘월드컵 공동 개최’란 성과를 이뤄냈다.
#정몽구 회장 프로필
주 소 :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231번지 현대자동차빌딩
학 력 : ~ 1959년 경복고
~ 1967년 3월 한양대 공업경영학과(학사)
~ 1989년 미국 센트럴코네티컷주립대(명예인문학 박사)
~ 2001년 1월 몽골 국립대(명예경영학 박사)
~ 2003년 11월 고려대 대학원(명예경영학 박사) 과정 수료
경 력 : 2000년 6월 전북 현대모터스 구단주
2000년 10월 현대모비스(주) 대표이사 회장
2002년 8월 외교통상부 경제통상 대사
현대캐피탈(주) 대표이사 사장
(주)로템 비상근 회장
한국경제신문 사외이사
2005년 3월 현대하이스코(주) 비상근 회장
2007년 (현)2012년 세계박람회유치위원회 명예위원장
<자료 : 전국경제인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