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향해 받들어 ‘창’

2007-11-15     남석진 
이·회·창 후보의 대권 도전사

1992년 12월 19일 눈물 속에 고별사가 흘러나왔다.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다. 나는 다시 돌아올 뜻을 감추고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은퇴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국민을 속이고 역사를 속이는 것이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연이어 패한 당시 김대중 민주당 총재는 이렇게 수 십 년간 몸담았던 정치권을 떠났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2년 12월 20일. 역시 또 한 명의 정치 거물인 이회창 전총재가 메인 목소리로 정치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저는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이 승복한다. 오늘 저는 정치를 떠나려고 하며 깨끗이 물러나겠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며 마침내 대통령의 권좌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김 전대통령의 과거를 반복이라도 하듯 대권 재도전에 나선 이 전총재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1995년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정치권에 복귀한 DJ는 이 전총재가 정계에 입문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 DJ의 대항마를 찾기에 부심하고 있던 민자당은 이 전총재 영입에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1996년 신한국당 선대위 의장으로 이 전총재는 정치에 두 발을 내딛었다.

1997년 두 사람이 맞붙은 대선에서의 승리자는 대선 4수에 나섰던 DJ였다. 이 전총재는 5년 후인 2002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지만 생각지도 않던 복병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패하며 고배의 쓴 잔을 마셔야만 했다. 대선 직후 이 전총재는 정치 은퇴 선언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장 처절한 심정”

그랬던 이 전총재가 다시 돌아왔다. DJ의 과거를 답습이라도 하듯 정치은퇴 선언을 번복했고, 대권 재도전에 나섰다.

이 전총재는 지난 7일, 남대문로 단암빌딩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동안 몸담았던 한나라당을 떠나 이번 대선에 출마하고자 한다”며 “우리는 이번에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좌파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 이순간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처절하고 비장한 심정으로 섰다”면서 “국민께 드렸던 (정계은퇴)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진심으로 엎드려 사죄드리고 용서를 빈다”고 덧붙였다.

이 전총재의 출마 선언은 대선 정국을 단번에 바꾸기에 충분했다. 기자회견을 전후해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 전총재는 20%대 지지율을 보이며 일약 2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 동안 심어온 ‘대쪽 이미지’는 정계은퇴 번복을 통해 상당 부분 훼손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YS·DJ와 ‘맞장’

이 전 총재는 두 번의 대선 패배 직전까지만 해도 ‘실패’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경기고와 서울 법대를 거쳐 23살의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어 대법관,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신한국당 대표 등을 거치며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의 자질을 꿰뚫어본 김영삼 전대통령은 93년 취임 직후 이 전총재를 감사원장으로 발탁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이 전총재는 YS와의 의견 충돌을 빚으면서 127일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전총재에게 아픔이었지만 대중적 인기는 이 때를 계기로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DJ의 대항마를 찾아야 했던 YS는 1996년 이 전총재를 다시 한 번 영입했고 1997년 3월에는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했다.

이 때까지 이 전총재의 정치 역정은 ‘순풍에 돛단 배’처럼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하지만 1997년 대선에서 DJ에게 패한면서부터 이 전총재는 정치권의 ‘쓴 맛’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실패한 ‘7년 대통령’

97년 대선에서 불거진 아들 병역 문제 등은 그 동안 이 전총재가 쌓아온 이미지에 결정타를 입혔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 생활은 이 전총재에게 또 다른 실험대가 됐다.

이 전총재는 이전과는 다른 리더십을 발휘하며 한나라당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데 성공했고 국민의 정부 중반 이후부터는 ‘7년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확실한 자리 매김을 했다.

하지만 2002년 대선은 ‘대세론’의 불안함을 보여준 또 한 번의 계기였다. 이 전총재는 이른바 ‘노풍’과 후보 단일화의 영향으로 다시 한 번 눈물을 떨구며 정치권과의 이별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2007년을 앞두고 한나라당 인사들의 바램은 이 전총재가 ‘킹 메이커’로서 큰 힘이 돼 주는 것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이 전총재의 주위를 지켰던 인사들 중에서도 이번 대선 출마를 예상한 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결국은 ‘킹 메이커’(?)

정치권에 다시 돌아온 이 전총재는 70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책상 위에 올라가 즉석 연설을 하는가 하면 첫 행보로 소년, 소녀 가장과 장애인을 찾는 등 기존 귀족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평소 복장도 노타이에 점퍼 차림을 즐길 정도로 달라졌다. 후보 뿐만이 아니다. 강삼재 전략기획 팀장, 이흥주 홍보팀장 등 캠프 핵심들도 점퍼 차림으로 소탈함을 강조한다.

범여권의 한 인사는 이 전총재의 최근 행보에 대해 “자연스러움과 여유를 강조한 것 까지 과거 DJ를 모방하고 있다”며 “초반 지지율이 높을지는 몰라도 상당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총재 자신이 “내가 선택한 길이 올바르지 않다는 국민적 판단이 분명해지면 살신성인의 결단을 내리겠다”고 밝힌 만큼 결국은 이명박 후보와 합칠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 전총재가 넘어야할 가장 큰 급선무는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전총재를 지지하는 측을 제외하고 사방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변칙을 넘어선 반칙행위이자 마라톤 42km중 41km를 넘은 상황에서 운동장에 들어와 테이프를 끊는 새치기와 같은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오지도 않은 좌파정권을 저주하며 낡은 이념의 틀에 갇힌 자기주장을 하는 이 전총재가 안쓰럽다”고 비꼬았다.

‘대쪽 이미지’에서 새로운 변신을 꿈꾸며 정치권에 돌아온 이 전총재의 행보가 어디로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