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2007-05-09 남장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울산 모비스가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06~07시즌 한국 프로농구(KBL) 정규리그를 2연패하고, 급기야 통합 우승까지 차지하자 모두가 놀라는 분위기다.
사실 모비스는 다른 구단에 비해 연봉도 적은 편이고, 전력도 그저그런 평범한 팀에 불과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모비스는 초반 부진에도 불구하고 한단계씩 전진하며 어렵사리 리그를 제패했고, KTF와 만난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타
이틀을 획득했다.
예상할 수 없었기에 더욱 감격스러웠던 모비스의 우승. 여기에는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유재학 감독(44)과 ‘꽃미남 황태자’에서 ‘코트의 마당쇠’로 돌아온 우지원(33)의 공로가 컸다. 지난 5월1일 울산 동천 체육관에서 열린 챔피언 결정전 7차전, 모비스의 우승을 알리는 휘슬과 함께 축포가 터지자 유재학 감독과 우지원은 뜨거운 감동의 포옹을 나누며 기쁨을 한껏 만끽했다. 코트 중앙에서 울먹이던 유 감독과 우지원은 각각 서로에게 “먼저 눈물을 보여 같이 울 수밖에 없었다”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트집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의 눈물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승을 향한 유 감독과 우지원의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아마추어 시절, 연세대 코치와 선수로 한솥밥을 먹으며 숱한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던 이들이었으나 프로는 언제나 ‘시련과 도전’으로 점철된 한스런 무대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애증(愛憎)’이란 단어로 명쾌히 정리됐다.
지난 96년 인천 대우 제우스에서 ‘코치-선수’로 나란히 프로에 데뷔한 유 감독과 우지원은 99~00시즌부터 ‘감독-선수’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불행히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첫 시즌에서 15승30패로 최하위를 기록한데다 두 번째 시즌에서 23승22패의 전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입했으나 4강 진입에 실패한 것.
결국 위기에 놓인 유 감독은 01년 우지원을 삼성의 문경은과 맞트레이드를 주도했고, 둘은 잠깐 동안 이별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프로 우승은 쉽지 않았다. 유 감독은 정규리그 5위와 6위를 오락가락했고, 최고 성적이라 해봤자 플레이오프 진입이 전부였다. 우지원도 삼성에서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 시즌만에 모비스로 쫓겨나듯 이적하고 말았다.
둘이 다시 재회한 것은 지난 04년. 03~04시즌을 마친 유 감독이 모비스 구단으로 옮겨오며 인연은 다시 시작됐다.
물론 유 감독의 부임 첫 해는 우지원에게 지옥과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수비를 강조하는 유 감독은 디펜스에 부진한 우지원을 스타팅에서 제외시켰고, 한동안 서먹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다. 05~06시즌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잔부상과 끝이 보이지 않던 ‘식스맨’의 설움을 톡톡히 느끼며 우지원은 이번 06~07시즌 초, 은퇴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하지만 유 감독은 우지원을 끝내 풀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꾸지람으로 조련했다. 결국 우지원은 외곽슛만 고집하는 예의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대신 적극적인 몸싸움과 리바운드를 펼치는 ‘마당쇠’ 타입으로 변모했고, 작년 12월에는 연맹에서 제정한 ‘식스맨 상’을 수상했다. 말 그대로 노장 투혼을 발휘한 셈이다. 붙박이 주전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우지원은 우직하게 제 몫을 해냈다. 유 감독이 시도하는 용병술 중심에는 늘 우지원이 있었다. 정규리그를 거쳐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까지.
프로 데뷔 10년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린 우지원은 “(유)감독님은 내게 정말 특별한 분”이라며 “이 영광을 모두 감독님께 돌리고 싶다”고 울먹였고, 유 감독은 “(우)지원이가 변했기 때문에 우리가 우승할 수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로에게 애증이 교차했던 지난 3년이 있었기에 올 시즌 우승은 더욱 의미있고,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