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달리는 SK이노베이션-LG화학 배터리 戰

정부의 강력한 중재ㆍ총수 간 대승적 합의만이 `출구`

2019-12-27     이범희 기자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벌이는 전기차용 배터리 관련 소송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양측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중재를 추진하고 있지만 감정싸움이 겹치며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세계 자동차 업계뿐 아니라 미국 정부까지 촉각을 기울이는 소송인 데다 SK와 LG 등 양측 모두 사활을 걸고 있어 섣부른 추측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최태원 SK 회장과 구광모 LG 회장이 직접 담판을 짓지 않는 한 해결이 여의치 않을 것 같다는 예상도 나온다.

"최태원-구광모 회장 직접 만나 풀어야", 성사될까
세계 자동차 업계미국 정부 등도 이번 소송 주목

지난 4월 시작된 양사 간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전이 2020년 6월 예비판결, 10월 최종판결 이후 항소심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LG화학 측이 주장하는 SK이노베이션의 `조기 패소` 결정이 나지 않은 한 이 일정은 그대로 진행된다. SK이노베이션은 조기 패소 결정이 난다면 `즉각 항소`할 뜻을 밝히고 있어 이번 소송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출구` 없는 배터리 전쟁…. 급격한 성장과 인재 유출 
 
SK이노베이션은 지난 8월 30일 LG화학과 LG화학의 미국 자회사인 LG화학 미시간(LG Chem Michigan Inc.)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연방법원에, LG전자를 연방법원에 각각 제소한다고 밝혔다.

LG전자는 LG화학에서 배터리 셀을 공급받아 배터리 모듈과 팩 등을 생산, 판매해 동시 제소하게 됐다고 SK 측은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침해된 특허는 무엇이고 어느 연방법원에 제소했는지에 대해 “접수가 완료되면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LG화학은 4월 “배터리 핵심인력 76명을 빼가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면서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 ITC와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SK이노베이션은 6월 서울중앙지법에 LG화학을 상대로 하는 ‘채무부존재(영업비밀 침해 없음) 확인’과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 LG전자가 ‘특허침해를 바탕으로 부당한 이득을 챙겼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LG화학 배터리 중 많은 부분이 특허침해에 해당한다”며 “생산 방식은 단기간에 바꿀 수 없어 LG화학 배터리 사업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서는 양사가 `조기 패소`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LG화학은 지난 11월 초 SK가 조직적·고의로 소송 전·후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증거를 없애고 포렌식 명령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재판을 SK이노베이션 패소로 조기에 끝내달라고 요청했다.

ITC 산하 기관 변호사들로 구성된 불공정수입조사국(OUII·Office of Unfair Import Investigations)은 LG화학 입장에 선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 SK이노베이션, 불공정수입조사국 등 3자는 ITC 행정재판부 요구에 따라 입장을 정리한 2차 의견서를 지난 6일과 11일에 제출했다.

LG화학은 의견서에서 "SK이노베이션은 계획적이고 고의로 증거를 훼손·은폐했다"고 주장하면서 거듭 SK이노베이션의 패소를 요청했다.

SK이노베이션은 "일부 증거 보존 면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긴 했으나 고의성은 없었고 소송이 제기된 후에는 전사적으로 증거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면서 LG화학의 요청을 전부 기각해달라고 맞섰다. 이어 "LG화학으로부터 일부 배터리 관련 정보를 취득하긴 했지만 영업비밀 침해로 보기 어렵다"며 "증거는 소송이 시작되기 전에 모두 없앤 것이기 때문에 `증거인멸로 인한 법정모독`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팔짱 낀 정부 “뭐 했나?” 중재자 역할 기대
 
두 회사가 배터리사업에 전력투구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회사의 명운을 좌우할 미래 먹거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정부의 강력한 중재나 그룹 총수 간 대승적 합의만이 종전선언에 이르는 가장 빠른 출구로 전망하기도 한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한 매체를 통해 “국내 굴지의 배터리 기업들이 외국에서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창피하다”며 “정부에 강력하게 중재에 나설 것을 조언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고 털어놨다.

김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두 그룹의 총수가 모여 양사 배터리사업의 장ㆍ단점을 서로 보완하는 MOU라도 체결하면서 대승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LG화학 측은 "(이번 사태에) 총수가 나설 사안이 아니고 법적 절차를 통해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야 하며, 합리적이고 타당한 협상을 위한 대화를 하게 되더라도 그 주체는 소송 당사자인 양사 최고경영진이 진행하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갈등 중재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날 선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반면 정부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에 개입할 시기와 방법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어느 시점에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 중”이라며 “국가와 국민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갈 것”이라는 원론적인 태도를 반복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볼 때 소송전을 펼치는 기업들이 판결을 앞두고 결과를 예측하며 물밑에서 각종 협의를 진행하는 만큼 정부는 이 시기를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ITC에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하는 기업들도 ITC 판결 직전에 합의를 끌어내는 경우가 많다. 정부 중재가 중요한 대목이다.

한편 세계 자동차 업계뿐 아니라 미국 정부까지도 이번 소송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소송 결과에 따라 미국 자동차 산업에 미칠 영향이 적잖을 것으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LG화학·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전을 정리하면서 "ITC 산하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은 LG화학 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미국 정부는 SK이노베이션에 관대한 결론이 나길 원할 것"이라고 전했다.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하면 ITC는 SK 배터리의 미국 수입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 경우 북미 지역 전기차 배터리 공급에 차질이 생겨 미국 자동차 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 최악에는 전기차 배터리 패권 경쟁에서 미국이 유럽·중국 등에 뒤처질 수 있다. 이런 점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려한다는 것이다.

WSJ은 이번 소송이 최종적으로는 미 무역대표부(USTR)의 결정에 달려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LG화학이 승소하더라도 USTR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