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박치기 왕… “레슬러는 내 운명”

2005-11-01     이수향 
1960~1970년대 기가막힌‘박치기’로 프로 레슬링계를 평정했던 김일(77) 선수.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리는 공포의 박치기 기술로 거구의 외국 선수들을 단방에 쓰러뜨렸던 김씨는 레슬링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알려져 있다.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은 잠시나마 암울한 현실을 잊고 흑백 TV앞에 모여들어 뜨거운 환호를 쏟아내곤 했다. 당시 장기간의 독재정권하에서 경제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김씨의 ‘화끈한’ 경기는 몇 안되는 기쁨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거구의 몸을 날려 상대를 제압하던 그는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노년이 되어 서울 을지병원에서 13년째 투병중이다. 21일 금요일 오전 그를 만났다.

여전한 카리스마

김씨를 만나기로 한 날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쌀쌀한 가을날이었다. 이날은 김씨가 오랜만에 병원 밖 나들이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의 외출 장소는 후계자 이왕표 대한종합격투기협회장이 운영하는 부천시 상동의 휘트니스 클럽.클럽 2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니 정장을 말쑥하게 빼입은 거구의 두 사내가 기자를 맞았다. 갑갑한 병상을 벗어나 ‘꽃단장’을 하고 제자의 클럽을 찾은 김씨는 어린 아이처럼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깡마른 체구가 오랜 투병생활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워낙 거대한 골격때문일까. “워낙 철저히 관리한 이유도 있지만 체격은 원래 타고났다”는 말처럼 그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정정해보였다. 앙상하지만 떡벌어진 어깨하며 솥뚜껑만한 손, 원색 셔츠로 한껏 멋을 부린 채 한치의 흔들림 없이 의자에 꼿꼿이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왕년의 카리스마가 그대로 뿜어져 나왔다.

6월말 큰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이 나빠져 오늘 내일을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은 루머에 불과한 듯했다.“요즘 75kg정도 나갑니다.” 김씨는 선수시절 받은 뇌손상으로 인해 정확한 발음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느리지만 최대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185cm의 키에 130kg이 넘게 나갔던 몸무게는 긴 투병생활로 인해 급격히 줄어들었고 머리에는 중간중간 검버섯이 보였다. 1963년 세계헤비급챔피언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통산 20회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 기록을 세웠던 국민 영웅 김일. 그는 ‘영원한 박치기왕’으로 남아 있을 거라는 국민들의 믿음을 뒤로하고 지병인 뇌혈관 질환 외에도 거대결장증과 임파부종, 심부전, 고혈압 등 병마와 고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제일 잘하는 놈 나와봐”

“그래도 선생님 건강이 다시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김씨의 인터뷰를 도와주던 이왕표 회장은 김씨가 거동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무대위를 펄펄 날아다니던 왕년의 모습이 그리운 듯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국민영웅 김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누구보다 깊은 회환을 느낄 사람은 김씨 본인일 터. 그래서일까.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기장을 수시로 찾는 등 그의 유별난 레슬링 사랑은 투병중에도 좀처럼 식을줄 모른다. 또 요즘들어 자신의 옛 경기 자료들을 찾아보거나 괴물같은 선수들을 맞아 영화같은 경기장면을 펼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일도 부쩍 늘었다.

그러나 레슬링의 오랜 침체는 김씨에게도 무척 아쉬운 일일 터. “선생님은 레슬링이 왕년의 인기를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세요. 예전에는 아무리 잘하는 선수가 있어도 말없이 지켜보다 가셨는데, 요즘엔 ‘잘한다’, ‘괜찮다’는 칭찬도 하시고… 보는 눈이 보통 예리하신게 아니에요. 얼마전 일본에 가셨을 때는 ‘여기서 제일 잘하는 놈 나와봐!’라는 한마디로 모든 관중을 압도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오랜 투병중임에도 김씨의 배짱과 강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김씨는 자신이 받았던 국민적인 사랑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강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나는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살았어요. 당시의 갈채와 환호소리가 아직도 생생해… 그렇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는데 링 위에서 쓰러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가장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팬들과 단절되는 것이지.” 이씨에 따르면 어려운 시절 온몸을 던져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던 김씨를 기억해 병문안을 오는 올드팬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이러한 관심과 사랑 때문일까.

김씨는 레슬러의 살아있는 전설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느끼고 몰라보게 기력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죽 반 공기도 못 먹을 만큼 위독한 상황에 치달은 적도 있었지만 현재 그는 병원 밖 나들이도 가능한 상태. “예전엔… 정말 잘 먹었지… 생선 아흔 아홉 마리와 갈비 40~50대를 혼자서 거뜬히 해치웠으니까… 맥주도 32,000cc를 마셨어”라며 김씨는 정작 과거를 회상하듯 자주 눈을 감아보였다.

영웅은 운명을 알고 있었다

55년 일본에서 역도산과의 운명같은 만남으로 레슬러의 길에 들어선 김씨는 30여년간 3,000회에 달하는 국내외 경기를 치렀다. 최고의 레슬러로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것은 물론, ‘국민영웅’이라는 명예까지 얻었다. “경기를 마치고 돈을 샌드백 가득 담아 위풍당당하게 돌아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우상이었죠”라는 이씨의 말은 당시 김씨의 화려한 전성기를 짐작케한다.그러나 외국의 거구들을 맞아 몸을 던져 혈전을 치르던 그의 레슬러 생활을 돌이켜볼때 현재의 투병생활은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또 설상가상으로 80년도 중반에 손을 댄 수산사업이 망하면서 전 재산을 날리고 오히려 빚더미에 오르는 불행을 맞게 된다.

그럼에도 김씨는 자신의 삶을 ‘레슬러로서의 운명’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십년을 매트위에 온몸을 던지며 뒹굴었는데 몸이 성한 구석이 있겠나. 나는 죽어도 레슬러인데 사업에 손을 댄 것은 실수지”라는 말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는 듯 비장하기까지 했다. “레슬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도 김씨는 “레슬러는 내 운명이지”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또 한번 인생이 주어진다해도 ‘레슬러’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무대를 날아다니던 전성기때 그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투병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는 광채가 빛났고 병색대신 위풍당당한 기를 내뿜고 있었다. 화려한 날은 지나갔지만 국민영웅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 “경기장 밖에선 인자한 아버님”
이왕표 대한종합격투기협회 회장 인터뷰

“제 신체 나이는 29살입니다. 하하하!” 사무실 천장을 뚫을 듯한 거구와 우렁찬 목소리가 마스코트인 이왕표 회장은 만년 청춘이다. 대한종합격투기협회 회장,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대표, 선문대학교 교수, 이왕표스포츠센터 대표 등으로 그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요즘도 매일 6시간씩 운동을 하며 몸만들기와 체력단련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늙을 시간도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이 회장이지만, 스승인 김일씨와의 정기적인 만남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사무실 한켠에는 김씨가 물려줬다는 붉은색 가운이 걸려 있었다.

- 김일씨는 어떤 분인가.▲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하다. 부모자식 사이 같은 현재도 강직한 인품은 그대로다.

- 과거 김씨에게 훈련받을 때를 돌이켜본다면.▲ 벌벌 떨었던 기억뿐이다.(웃음) 훈련중에는 너무 엄하셔서 눈도 못 마주치고 숨도 못 쉬었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서는 인자하신 아버님 같았다.

- 김씨 건강은 어떤가.▲ 다리관절이 안좋아서 거동이 불편하실 뿐 많이 좋아지셨다. 100세는 거뜬히 넘기지 않을까 싶다.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레슬러들에겐 큰 버팀목이 된다.

- 오랜 투병생활에 대해 뭐라 하나.▲ 왜 안갑갑하시겠나. 화려한 날을 보내신 분이라… 본인은 괜찮다지만 외롭고 쓸쓸한 눈치다. 그래도 긴급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병원생활을 택하셨다.

- 가장 가까이서 김씨를 지켜보는 심정은.▲ 제자가 아닌 팬의 입장에서 안타깝고 가슴아프다.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줬던 국민영웅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뒀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국가차원에서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 얼마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이 격려금을 전달했는데.▲ 국가에서 이뤄진 첫 격려금이었다. 팬들은 선생님을 못잊어 찾아오곤 했지만 정부측에서는 선생님의 고통에 대해 침묵했다. 그동안 선생님은 지인들의 후원과 도움으로 어렵게 생활해오셨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잊혀져가는 국민영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 강단에 선 느낌은.▲ ‘프로레슬러란 이런거다’라는 것을 알릴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안되는 레슬링을 기피하는 요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휘트니스 클럽을 운영하는 것도 후계자 발굴, 양성차원에서다. 나는 레슬링의 부흥을 꿈꾸는 영원한 레슬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