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하는 심정으로 권력 심장 쐈다”

2005-08-22     홍성철 
“정치복귀의 뜻이 있었다면 회고록은 절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회고록 발간으로 정치권에 적잖은 파장을 던지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박철언 전 의원이 던진 일성이다. 도청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5,6공 시절의 정치 비사를 책으로 발간한 배경과 관련해 갖가지 억측이 나돌고 있는데 따른 하소연인 셈이다. 그는 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사전 교감 여부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그 분들과 사전에 상의했다면 회고록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박 전의원은 5·6공 시절에도 도·감청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해 도청정국의 또다른 불씨를 남겼다.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박 전 의원. 그가 자신은 물론 5,6공 세력들에게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안기면서까지 회고록을 발간한 진짜 속사정은 무엇일까. 지난 19일 오후 박 전 의원의 개인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회고록 발간 배경 및 책 내용을 둘러싼 각종 의문점 등을 들어봤다.

- 회고록에 충격적인 내용이 많아 화제와 함께 파장도 적지 않은데.

▲ 한국 정치가 보다 깨끗해지고 국가운영과 권력운영이 보다 투명해지기 위해서는 그 시대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가 생생한 그 현장의 기록과 증언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시절에 대한 바른 기록과 증언은 현직에 있는 국가경영의 주역을 비롯해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주역들이 역사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옷깃을 여미며 깨끗하고 떳떳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개인적으로는 마이너스이나 바른 역사를 위한 바른 증언을 남기기 위해 용기를 낸 것이다.

- ‘안기부 X파일’ 등 과거 정권의 부도덕한 정치행태가 논란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책이 출간돼 그 배경에 의혹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 나는 지난해 3월31일 “이제는 무대를 떠나려 합니다”라는 공식성명을 통해 정치현장을 완전히 떠났다. 그리고 4월부터 바른 역사를 위해서는 바른 증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회고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출판사와의 계약 내용에 따라 집필 작업을 했고 약속대로 지난 10일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누가 7월 후반들어 안기부 X파일이 터질 줄 상상이나 했겠나. ‘X파일 정국’과 회고록 출간은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치재개를 위한 정지작업일 것이란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데 정치 일선에 복귀할 계획은 없나.

▲ 절대 그런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정치복귀의 뜻이 있었다면 이번 회고록은 절대 쓰지 않았을 것이며 출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네 분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분들에게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깨끗한 정치, 투명한 국가운영을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전기를 마련하는 시금석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과정에서 스스로 속죄양이 되기를 각오했다.

- 책 출간 과정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이나 현 정부의 묵인 내지는 사전 교감은 없었나.

▲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물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도 회고록 출간에 대해 언급한 바 없다. 사전에 상의를 했다면 아마 이 책은 세상에 빛을 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책이 출간되고 난 후 내가 직접 모셨던 두 분 전직 대통령께는 책을 보내드리는 것이 도리일 듯하여 비서실로 책을 보내드렸다. 또 회고록 발간 동기가 깨끗한 정치, 투명한 국가운영을 위한 것이니 만큼 노무현 대통령께도 책을 보냈다.

- 어떤 반응을 보였나.

▲ 제3자를 통해 전달한 만큼 그분들이 책을 받아보셨는지 또 내용을 읽어 보셨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아직까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 회고록에 등장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내용을 부정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 허위의 사실을 기록해 명예를 훼손한다면 현행법상 민·형사상 책임이 있다. 이 회고록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행했던 일 중에서 일지와 수첩에 기록된 사실들만을 정한 것이다.일부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부인한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지와 수첩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정작 본인은 알 것이다. 독자와 국민들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 회고록 내용중 대법원장 후보와 대법원 판사 내정자들을 직접 면접한 것으로 돼 있는데 당시 박 전 의원의 나이(40세)를 감안하면 다소 지나친 주장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은데.

▲ 표현상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시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에 대한 헌법상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 분들을 조용히 만나 의견을 듣고 또 면담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은 대통령 법률담당 참모로서 했던 것이다. 또 81년 당시 내 나이가 40세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법원 판사 내정자들 상당수가 40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잣대로 보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본다.

- 김영삼(YS) 전대통령측도 ‘40억원+α’ 정치자금 수수 주장을 부인하고 있는데.

▲ 사실 돈을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전달한 나 자신이나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다. 국민과 역사에 사죄하고 용서와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통해 바른 역사를 위한 바른 기록을 남긴다는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를 ‘기억’이 아닌 ‘기록’에 의해 밝힌 것이다. 회고록에 구체적인 수표번호와 당시의 일지까지 카피해 첨부했으니 독자들이 판단할 것으로 생각한다.

- 한나라당은 YS와의 악연으로 인한 보복성 내용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 악연이니 사감이니 운운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런 생각이었다면 93년 봄 나를 투옥시키려던 당시나 YS 재임기간에 증언하지 왜 공소시효가 완전히 지나간 15년 후에 증언하겠나. 내가 더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또 기억이 떨어지기 전에 하기로 용기를 낸 것이다.

- 박 전의원은 오히려 YS정권 출범 후 터진 ‘슬롯머신 사건’이 YS의 지시하에 이뤄진 보복수사라고 주장했는데.

▲ 회고록에 92년 말부터 내가 구속됐던 93년, 그리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졌던 94년까지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는 나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당시의 신문보도, YS정권 말기에 각종 언론이 특종으로 보도했던 상황들을 기록한 것이다.

- 3김 중 YS와 DJ(김대중 전대통령)가 관계된 ‘검은 뒷거래’ 의혹 등은 비교적 적나라하게 공개한 반면 JP(김종필 전자민련총재)와 관련된 내용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 3당 통합 이전에 정계 대개편을 위한 야당과의 물밑 대화과정에서 나는 YS와 DJ를 주로 접촉했고, JP는 다른 사람이 접촉했다. 따라서 JP와 관련된 내용은 내가 직접 행했던 부분만 기록했다.

- 과거 정보기관의 불법도청 사건을 둘러싼 정치공방이 심화되면서 국민적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검찰도 중심을 못 잡고 있는 이른바 ‘도청정국’을 타개할 해법을 제시한다면.

▲ 국가기관의 범죄적인 불법 도·감청은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아야 한다. 다만 그 내용의 공개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수사의 단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전면 공개는 인권침해일 뿐 아니라 헌법위반의 우려마저 있기 때문이다.

- 박 전의원도 회고록에서 ‘노 전대통령이 전두환 전대통령까지 도청하고 감시했다’고 주장했는데 5,6공 시절에도 유력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한 도·감청이 이뤄졌나.

▲ 나는 도·감청을 직접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6공 시절의 도·감청에 대해서는 상식의 선에서 생각하면 될 것이다.

- 상식선이라면.

▲ 당시 안기부는 소관 업무와 차단 원칙이 분명했다. 나는 안기부장 제2특보로 남북 문제와 공산권과의 수교 문제 등을 담당했다. 도·감청 및 공작정치와는 무관했다. 다만 회고록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국가안보 및 정권유지 차원의 도·감청은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 20년간의 정치 비사를 책 두권에 모두 담지는 못했을 것이란 시각도 있는데 회고록을 추가로 발간할 계획은 없나.

▲ 내가 가지고 있는 일지와 수첩의 내용 전부를 기록으로 남기자면 열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 3개월 동안 회고록을 쓰면서 혼을 다 쏟아붓다보니 지금 진이 다 빠진 상태다. 앞으로 회고록을 다시 쓸 계획은 없다.


# 박철언 전 의원은 누구 - ‘6공 황태자’ ‘비밀특사’ 별칭 노태우 정권 실세

자유민주연합 부총재와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철언씨는 ‘6공의 황태자’, ‘비밀특사’ 등의 별명과 함께 노태우 정권의 실세로 꼽혔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반목으로 1년 4개월 동안 투옥생활을 하는 등 격동의 삶을 살았다. 1942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초등학교, 경북중·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수석졸업)과 사법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미국 조지 워싱턴 법과대학원과 조지타운 대학에서 공부한 뒤, 한양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디킨슨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 부산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해 서울지검 특수부장검사와 검사장을 거쳐 1980년부터 5년간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법률비서관을 지냈다. 당시 그는 중장기 국가정책을 종합적으로 마련하는 한편, 그동안 준비해온 북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박씨는 수십차례에 걸쳐 소련, 중국, 헝가리, 체코, 베트남 등 미수교국으로 비밀출장을 다녀왔다. ‘비밀특사’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바로 이때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을 다녀온 적도 21차례에 달하며, 42차례 남북고위급 비밀회담의 남측수석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안기부 부장 특별보좌관·외교안보연구원으로 지냈고, 13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갑)에 선출된 1988년부터 1년 동안 청와대 정책보좌관을 맡기도 했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는 정무장관과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체육청소년부 장관 시절 그는 야당과 언론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생활체육협의회를 전국적으로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정무장관 시절에는 ‘3당 통합’을 이뤄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표와의 반목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1년 4개월 동안 투옥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자유민주연합 부총재(1995년~1997년)를 지냈고, 2000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교 아시아경영연구소 객원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는 2001년 자민련을 탈당했다. 현재는 변호사로서 무료 변호와 법률 자문, 특강, 대학 강단을 오가면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1995년에는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