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선 전략’에 ‘박정희 용인술’ 가동

2006-09-08     이금미 
박근혜 친위 4인방 경쟁 치열

만개한 정치의 계절이다. 그동안 잠잠했던 ‘한다’하는 ‘선거꾼’들도 이제는 배부른 고민을 할 때다. 2007 대선을 위한 당내 대권주자들의 선거캠프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콜’이 쏟아지고 있으니, 되는 방향으로 발걸음만 떼면 된다. 고민은 짧고, 행동은 민첩할수록 대권주자에게 좋은 인상으로 각인될 것임은 분명하다. 때문에 대선 도전을 선언한 대권주자 진영은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박근혜 전대표 진영은 여전히 베일 속에 싸여있다. 친위사단이 나서 캠프를 꾸릴 인재를 영입하고 있으나, 누가 누구의 하부조직인지도 알 길이 없다. 또 ‘박근혜 대통령’을 외치고 있음에도 살림은 따로 차릴 태세다. 친위사단의 소통 부재, 이른 바 ‘충성경쟁’이다.



박근혜 대선캠프 각개전투 결과?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핵심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는 ‘박근혜맨’에는 누가 있을까. 일단, 유정복 김무성 유승민 의원과 이성헌 전의원이 꼽힌다. 대선을 준비하는 시점, 대선캠프의 중요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박 전대표의 ‘신뢰’는 이미 검증단계를 거쳤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지난 2년 ‘박근혜 대표’ 시절, 이들은 모두 주요 당직을 맡으며, 박 전대표와 손발을 맞춰왔다. 박 전대표는 유정복 유승민 의원을 비서실장에, 김무성 의원을 사무총장, 이성헌 전의원은 제2사무부총장에 기용한 바 있다. 그렇다면 비밀리에 대선캠프 진용을 짜고 있는 박 전대표 주변에서 이들 박근혜 친위 4인방간 ‘충성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은 무슨 얘기일까. 이와 관련, 박 전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는 한 측근인사는 “박 전대표가 이들을 한 자리에 소집하거나 규합한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그는 “박 전대표의 스타일상 대선캠프일지라도 직접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덧붙였다.

결국, 박근혜 대선캠프는 이들 4인방의 각개전투를 통해 얻은 결과물, 다시 말해 ‘상납’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충성경쟁에 의해 인재를 채워나간다면 박 전대표의 대선캠프는 경쟁력에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는 구상이기도 하다. 짚고 넘어갈 대목은 친위 4인방의 인재영입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박 전대표는 특정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한나라당 주변에서 “박 전대표가 선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용인술을 답습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구조 기본 골격 ‘공조직’
사실, 박 전대통령의 용인술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큼 절묘했던 게 사실이다. ‘박정희 외교는 등신, 용인술은 귀신’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대통령 경호실, 비서실, 중앙정보부, 방첩부대 등을 중심으로 국정운영의 맥을 이어나갔음에도, 어느 한 곳에 힘을 실어주지 않음으로써 이들의 충성과 경쟁을 자연스레 유발시켰으며,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제압하는 데 있어서도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또 사조직을 가동하지도 않았으며, 비선으로 분류되는 정체불명의 수족도 거느리지 않았다. 안정적인 권력구조의 기본 골격을 철저하게 공조직 위주로 채워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용인의 기본은 신뢰였다. 하지만 먼저 손 내미는 일도 없었고, ‘나와 함께 하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고, 주변인물에 항상 신중하게 접근했으며, 본인이 직접 나서는 일도 절대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박 전대통령 주변의 공조직 수장은 모두 권력의 ‘2인자’였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해 박정희 사단과 그의 공화국은 더욱 견고한 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용인술은 장기집권과 강력한 리더십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바로, 견제를 통한 힘의 분배와 균형이다. 때문에 친위사단을 구성하는 인원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박 전대표를 위해 야전(野戰)에 나설 사람들의 주변은 라이벌 이명박 전서울시장이나 손학규 전경기도지사 진영에 견줘 요란하지 않다. 게다가 이들을 통해 4인방 중 누구를 매개로 박 전대표에 연결돼 있는지도 들을 수 없다. 하부조직간 경쟁인 탓에 그만큼 조심스럽다는 얘기다.

한편, 박 전대표가 사람을 버릴 때 매섭게 몰아붙이는 것 역시 선친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평가다. 특히, ‘박근혜의 대선공약 산실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던 여의도연구소와 관련, 박 전대표의 깔끔한(?) 처리는 당내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 그가 대표로서 공개적으로 추진한 사안과 관련, ‘각’을 세운다면 주요 당직자라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정치 처형’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소통 부재’의 부작용 10·26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박 전대통령 시절 2인자들간 ‘소통의 부재’가 낳은 부작용이다. 79년 10·26 사건 직전, 2인자들간에 벌어졌던 치열한 권력 다툼은 박정희 용인술의 극과 극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당시 2인자들 중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양강을 형성하고 있었다. 10·26 직전에는 차지철의 세력이 더 강한 상태였는데,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의 견제를 받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차지철에 의해 모든 정보채널이 차단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소통의 부재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그해 10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등 대통령 주변 2인자들간의 역학관계를 분석,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를 박 전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끊임없이 청와대 내부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러한 접근은 박근혜 체제 2년을 경험한 한나라당의 박근혜 친위 4인방간 소통의 부재가 가져올 만약의 사태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박 전대표가 보여줄 박 전대통령과 또 다른 용인술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박 전대표 자신이 권력의 속성과 변질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용인술의 핵심은 분할 통치
박정희 전대통령의 용인술의 핵심은 충성인사와 능력인사를 구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있다. 또 2인자들간 충성경쟁이 권력 암투로 변질된 순간 이를 바로잡는 역할도 2인자에게 주어진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박 전대통령의 용인술이 빚은 과정과 결과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육사 8기 김형욱의 충성은 박 전대통령의 조카사위인 김종필(JP)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육사 동기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JP의 천거로 인해 박 전대통령 눈에 들었다. 대표적인 ‘충성인사’였던 김형욱을 2인자 중 실세 2인자로 만들기 위한 박 전대통령의 전략은 교묘하기까지 했다. 김형욱 역시 박종규 경호실장, 윤필용 방첩부대장 등과 경쟁하며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에 발 벗고 나섰다. 박 전대통령은 김형욱을 뛰어난 친화력과 언변으로 대통령 자리를 넘보고 있는 JP에 대한 견제 카드로 이용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69년 ‘3선 개헌’. 김형욱은 ‘국민복지회’ 사건을 조작, JP를 정계에서 은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2인자 김형욱의 역할이었다. 3선 개헌이 통과되고 불과 3일 뒤, 아무런 사전 통고도 없이 해임되기에 이른다.‘능력인사’의 대표적인 예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때 후계자 소문도 따를 정도로 정치권의 견제 대상 1순위였다. 한편, 72년 10월 유신을 정점으로 JP와 이후락, 차지철 경호실장의 충성경쟁은 절정에 이른다. JP는 10월 유신 당시 이후락에 의해 견제를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들의 관계는 라이벌로 발전한다. 이후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경쟁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대결로 치달았으며, 78년부터 경호실이 우위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