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과정 노무현 대통령 닮았네
2005-01-20 이인철
대구지하철참사 조사 활동
경북 청도 출신인 김 비서관은 수많은 양심수들과 노동운동가, 시국사건으로 고통받는 학생들의 무료변론을 도맡아 대구 최초의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을 들을 만큼 지역사회의 대표적 인권운동가로 통한다.대구,경북지역 시민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환경연합 집행위원, 경실련 집행위원, 새대구경북시민회의 운영위원, 경상북도 행정심판위원, 반부패국민연대 대구본부운영위원장, 대구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 등 지역 시민단체 및 행정지원 활동을 통해 시민운동의 길을 걸어왔다. 이같은 활동을 통해 그는 대구 지역에서 많은 신임을 얻었다. 이는 2003년 2월 대구시민들을 실의와 충격에 빠지게 했던 대구지하철참사사건 당시, 실종자인정사망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데서 잘 보여준다.
자칫 유가족과 대구시의 중간에서 난처한 입장이 되기 쉬운 직책이라 많은 사람들이 기피한 자리였다. 하지만 김 비서관은 이 일을 맡았고, 조정역할을 수행해 양측으로부터 ‘공평하게 일 처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딸을 잃었던 희생자 가족 윤근씨는 “참사 수습과정 또한 하나의 참사였듯 수습은 수습이 아니라 영원한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우리의 가장 큰 염원은 사망을 인증받는 것이었다”며 “그때 지하철참사 인정사망 심사위원장의 중임을 맡아 고통받고 한 맺힌 유족들의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주신 분이 김 변호사였다”고 말했다. 윤씨는 또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잘해야 본전 잘못하면 욕 얻어먹고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를 곳에서 고통 받는 자의 통한을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며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다. 김 비서관에 대한 평가는 또 대구시와 유가족 양측 모두의 추천을 받아 지하철참사 희생자 추모사업 추진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의문사위 활동을 빼놓고는 김 비서관을 설명할 수 없다. 국민의 정부시절 만들어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제1상임위원으로 임명돼 많은 의문사 사건들을 처리했다. 그는 타살이냐 자살이냐를 두고 국방부와 갈등까지 빚었던 허원근 일병 사건을 비롯해 최종길 교수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의문의 죽음을 푸는 데 기여했다. 특히 5기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씨 의문사와 관련, 김씨가 대선자금공개, 한보비리진상규명등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성이 있고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으로 인정하게 했다. 당시 김준배씨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에 대해 보수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비서관은 “김준배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압력을 받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밝혔다.변호사 활동을 통해 인권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을 펼쳐온 김 비서관은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노 대통령과 닮은 꼴 인생
중학교 학비가 없어 대구중학교에 입학하고도 다니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한 빈농의 아들이었다. 이후 대구상고와 경북대 법대를 졸업한 김 비서관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덕분에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장래가 보장됐던 은행문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과감히 박차고 나왔다. 대학시절 기독학생회(KSCF) 활동을 하면서 가졌던 사회 정의와 민주화에 대한 열정을 포기한 채 안락한 삶 속에 묻혀 지내는 자신의 모습에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사회운동을 결심했고, 30이 넘는 나이에 사법고시를 준비해 4년만에 합격했다. 이같은 이력 때문에 김 비서관을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하기도 한다. 빈농의 아들, 상고출신, 인권변호사 활동 등 삶의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운동을 해오던 김 비서관은 여권의 권유로 17대 총선에 출마해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여권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개혁의 바람을 안고 지역주의타파와 의문사 없는 세상을 위해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섰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영남 싹쓸이 반대를 외치며 단식농성까지 했지만 패배의 쓴맛을 보았다. 김 비서관의 출마설이 나돌자 의문사유가족들은 총선출마를 반대했다.
이에 대해 김 비서관은 당시의 총선출마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2003년 11월 총선 출마를 위해 의문사위를 그만 뒀다. 당시 유족들이 ‘대구에 내려가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국회에 입성해 법사위에 들어가 의문사위의 활동이 강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내려갔었다.” 그러나 지난 6일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산적한 사회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8일부터 출근을 시작한 김 비서관은 “개인적인 욕심은 없다”며 “참여정부와 대통령이 꼭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전문성과 혁신역량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선발했다”는 청와대의 설명처럼 각종 사회갈등의 현장에서 일해 온 김 비서관이 산적한 현안을 어떻게 조정해 나갈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