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섹스·향응이 질펀한 ‘검은 로비’…블랙 머니가 판친다
2006-08-03 정은혜
우리 사회가 이 같은 오명(汚名)을 쓴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부정부패 스캔들이 문제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브로커’였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가치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커는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만연하고 있는 실태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뒤흔든 브로커들을 살펴보면, 비리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 유형도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인맥관리에 남다른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이들의 로비행각에 소위 금기시(?)되는 사안들이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흥미롭다. 돈, 술, 여자, 도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일요서울>은 그동안 파문을 일으킨 브로커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세계에 대해 집중 분석했다.
브로커가 판치고 있다. 최근 언론에 헤드라인을 장식한 브로커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는 사회가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방증이다. 브로커를 존재케 하는 사회적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구체적인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브로커가 판치는 사회구조
>브로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정보전달’만을 하는 ‘중개자’ 역할과 ‘정보전달+문제해결’을 하는 ‘조정자’ 역할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정’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이 개입하는 상황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바닥의 생리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 A씨는 “브로커가 하는 조정은 가능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그것이 성사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며 “주로 정치권이나 권력기관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기에 드리워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브로커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정보의 부재, 또는 편재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행정관청 등 권력기관에서 어떤 중요한 자료를 신청한다거나 정보를 얻고자 할 때, 신청인 입장에서는 그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상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게 사실상 공식적인 경로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청인은 담당자와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을 터. 이 대목에서 신청인과 브로커가 만나게 된다.
이처럼 브로커는 일반인 대상, 민원을 도맡아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데 일조한다. A씨에 따르면, 브로커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은 최고 권력자와 가까운 이들이다. 그들이 직접 최고 권력자를 만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권력 2인자나 친인척들에게 눈을 돌린다는 것. 김대중 전대통령의 차남 홍업씨가 그 예다. 그는 브로커들에게 0순위 공략대상으로 지목, 이후 재벌 2세 및 고위 공직자들과 클럽을 맺는 등 본격 로비스트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통령의 아들’로서 공인의식을 완전히 망각하고 사실상 로비스트 행세를 하고 다닌 것이다. ‘로비스트’는 ‘미국에서, 특정 단체를 대표하여 입법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정당이나 의원을 상대로 활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전문지식과 지명도를 배경으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정상적인 직업이다. 하지만 로비활동이 합법적이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로비스트는 곧 브로커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헌법재판소는 “우리 역사상 로비는 비합리적 의사결정에 이용돼 온 점에 비춰 알선수재를 처벌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결정한 바 있다.
마당발에 언변까지 뛰어나
법조계나 정치권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브로커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방대한 인맥을 형성, 관리하는데 남다른 노하우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뒷돈을 건네고 청탁하는 수준이 아니다. A씨는 “로비 대상만을 공략해서는 거물브로커가 될 수 없다”며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아쉬워하는 것을 척척 알아내 제공할 줄 알아야 진정한 거물”이라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브로커들은 대부분 고향이나 학연, 지연, 친인척 등을 거론하며 접근한다. A씨는 “학교 선후배는 물론, 군 선후배나 사돈의 팔촌까지 내걸어 접근할 정도”라며 “이들 중 대부분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기 보다는 막무가내로 돈 봉투를 놓고 가 나중에 돌려주느라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브로커들은 로비 대상의 결혼기념일과 그의 아내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자녀의 대학 진학부터 취업까지 책임진다. 심지어 운전기사와 파출부에게도 신경 쓴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사전 작업을 해 놓은 뒤, 그들은 권력 실세에 속하는 누구누구를 아는 것처럼 행세한다. 보는 앞에서 전화를 걸기도 한다. 또 선거 때 실제로 도움을 주거나 계보원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쌓아놓은 인간관계를 이용한다고도 전해진다. 브로커들은 상대가 누가 됐든, 한 번 접촉하면 반드시 명함을 받는다고 한다. 받은 명함은 후일 남에게 보여줄 때 사용되며, 명함이 없더라도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이름을 팔고 다니기도 한다. 이처럼 브로커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과장하고 포장한다.
‘줄’이 없거나 없어 보이는 브로커들을 상대하지 않는 게 의뢰인들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청와대나 권력기관 등을 사칭하는 사기사건이 빈발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정치권이나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 주변에 이들과 비슷한 브로커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A씨는 “이들은 대체로 마당발에 청산유수의 언변실력을 가지고 있다”라며 “뚜렷한 수입이 없어 보이지만, 수완이 좋고 씀씀이가 후해 권력실세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물급’들, 손안댄 로비 없어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브로커들의 로비행각이다. 이들이 활동하는 배경에는 돈과 권력, 인맥은 물론, 술, 여자, 도박 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활용하는 정도와 규모에 따라 ‘거물’ 여부도 가늠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거물 법조브로커’라는 이름으로 최근 파문의 중심에 있는 김홍수씨와 윤상림씨. 이들 사건에는 ‘돈 로비’와 ‘인맥 로비, ‘술 로비’가 공통분모로 속해 있다. 먼저, 김홍수씨는 법원·검찰·경찰에 인맥을 심어두고, 술자리를 통해 교분을 쌓았다. 또 고등법원 J부장판사에게 청탁 대가로 돈과 3,000만원 상당의 고급 카펫을 준 것으로 알려져 ‘돈 로비’, ‘카펫 로비’ 의혹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윤상림씨는 정·관·군·검·경·재계 등 각 계의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1,000명이 넘는 소위 ‘윤상림 리스트’를 통해 온갖 로비 의혹에 연루됐다. 윤씨의 로비활동 반경에는 돈, 술, 권력, 인맥뿐만 아니라 ‘칩(도박에 사용되는 것)’까지 활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희대의 브로커’라는 별칭에 손색이 없음을 증명했다. 윤씨가 2003년 이후부터 강원랜드에서 도박을 하며 칩으로 바꾼 돈이 무려 250여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가호위로 권세 휘두르다 낭패
‘금융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김재록씨와 ‘최규선 게이트’라는 사건이름까지 만들었던 최규선씨의 사례를 보면 ‘성공한 자는 성공한 것으로 망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는 성공시킨 요인에 바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들은 정치적 배경을 이용하려다 정치로 망한 케이스다. 두 사람 모두 국회의원을 꿈꾸고 정치권에 발을 들였지만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김재록씨는 금융권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국내 공인회계사 자격증도 없이 모 회계법인의 부회장에 오를 정도로 수완 또한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스타일은 정권의 실세나 고위 관료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호가호위’형이었다, 즉 ‘권력 로비’를 벌인 셈. 그는 오포 수사에서 현대차 비자금 수사로 이어지는 중간에 끼여 있어 ‘거악’으로 지목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수사는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고 사실상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의혹에 연루돼 구속된 최규선씨. 그는 IMF 사태 이후, 생소한 국제경제 분야에 남다른 인맥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이회창 후보, 이인제 후보와의 3자 구도를 구상하고 있던 DJ 진영에서 눈에 띄는 참모이기도 했다. 최씨는 DJ의 지지도를 얻기 위해 영향력을 넓혀 나가며 ‘권력 로비’를 벌이다 게이트에 연루, 구속됐다.
‘몸로비’ 파문 일기도
지난 2000년에는 두 여인이 수천억 원이 투입된 대규모 국책사업을 쥐락펴락했다는 사실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던 적이 있었다. 국방부의 정찰기 도입 사업인 ‘백두사업’에 개입했던 린다김씨와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 로비의혹에 관련됐던 호기춘씨가 그 장본인이다. 두 사람 모두 ‘재력’과 ‘미모’를 바탕으로 사업결정의 배후에서 로비를 했다.
특히, 수년 전 연서(戀書) 파문을 일으킨 린다김 사건은 로비대상인 고위공직자들이 되레 로비스트에게 ‘몸 로비’를 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 로비를 벌인 사례도 있다. 정부 1급 로비스트 김홍업씨. 그는 지위와 고위층 인맥을 활용, 각종 이권에 개입한 대가로 수십억원을 챙겼다. 김씨는 또 무역금융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을 도와줬으며, 후일 이 사례는 조금씩 소문이 나 일부 기업인들 사이에서 그를 ‘성공률 100%의 전문 로비스트’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돈과 술,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씨는 신인 탤런트와 여대생 등이 시중을 드는 강남의 고급 유흥업소를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업소 마담은 김씨의 로비 관련 문제로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는 등 수모를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비 양성화’ 법안 도입에 관심
각종 사업이나 사건의 처리 과정에 개입, 뜻한 바를 이루게 해주고 금전적 반대급부를 취하는 한국의 로비스트들은 수시로 합법과 불법의 영역을 넘나든다. 때문에 한국의 로비스트들은 브로커와 구별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브로커와 로비스트 사이에는 담벼락만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잇따라 터지고 있는 로비 사건을 두고 세간에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로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국이 홍역을 치르는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면 다소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로비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가청렴위원회가 올 연말까지 로비를 양성화하는 법안을 제출키로 한 가운데 향후 한국이 ‘브로커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