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화재 참사는 인재였다”
2006-07-27 강훈 프리랜서
“건물주와 노래방 주인, 목격자 등을 상대로 1차 조사를 해보니까 불은 지하 1층 노래방 소파에서 시작된 걸로 추정된다.”지난 19일 발생한 잠실동 고시원 화재사건에 대한 브리핑 과정에서 서울 송파경찰서 이희성 형사과장이 사건 개요와 수사계획을 설명했다. 이번 화재 사건이 파문을 낳고 있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 서민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고시원에 ‘고시생은 없고 일용직 근로자가 대부분’이었다는 게 단적인 사례다.
고시원은 ‘시한폭탄’(?)
소외계층의 주거시설로 전락한 이른바 ‘쪽방’은 공식적으로 서울에만 350개 건물에 4,000여개나 들어서 시험 준비생뿐 아니라 일용직·무직자들을 대상으로 성업 중이다. 화재가 난 1.5평가량의 ‘쪽방’ 고시원은 입주자들이 전기장판 등 각종 전열기를 사용하는데도 외부와 통하는 창문이 없어 유독가스가 빠져 나가지 못하는 구조였다.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불길은 지하 1층 노래방에서 폭발음과 함께 솟아 건물 전체로 번졌다.
불은 25분 만인 4시20분께 잡혔지만, 1층까지 천장과 계단 등을 따라 불이 순식간에 번진데다, 유독가스가 건물을 에워쌌다. 불이 나자 2층 건설회사 사무실 직원들은 신속히 대피했으나, 고시원은 상대적으로 높은 층에 있었고 방이 36개 가량 밀집한 까닭에 여유 공간이 적어 인명피해가 컸다. 목격자 한 모씨는 “불길과 연기가 3~4층으로 급속히 번지면서 건물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며 “119구조대가 바로 출동했지만 이미 연기가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을 구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상가 주변 주민들은 4시께부터 직접 사다리를 들고 와 피해자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경찰은 “지하 노래방 창고에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기름통이 보관돼 있어서 불이 이것에 옮겨 붙으면서 순식간에 번지고 유독가스가 많이 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상자가 많았던 또 다른 이유는 고시원의 전형적인 구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한 고시원 건물은 지하 노래방, 1층 식당, 2층 사무실, 3~4층 고시원으로 이뤄져 있다. 고시원은 한 층에 1.8~3평의 작은 방들이 3층 34개, 4층 36개가 벌집처럼 들어차 있으며, 3층은 여성용, 4층은 남성용이다.
화재 당시 현장에 없어 위기를 모면한 고시원 거주자 강 모씨는 “거주자 가운데는 밤이나 새벽에 일을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와 쉬는 노동자들과 취업 준비생이 가장 많다”며 “고시원 3~4층 전체에 대략 40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부상자 11명 가운데 6명은 20~30대, 5명은 50~60대였다. 월세는 25만~40만원 가량으로, 벌이가 변변찮은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숙박업소 노릇을 한 셈이다. 특히, 3~4층 고시원엔 소화기나 완강기, 로프와 같은 화재 대비 장비는 없었고,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으나 화재 당시 작동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출구도 계단과 현관으로 이어지는 한 곳뿐이었고, 60×90㎝ 크기의 바깥쪽 창문은 방충망을 뜯어내야 탈출할 수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서울지방경찰청 감식반은 지난 20일 오전 현장 감식을 벌인 결과 화재가 난 D빌딩은 소방법상 각 층마다 방화문을 설치해야 하지만 고시원이 있는 3∼4층에는 방화문이 없거나 뜯겨져 있었다. 고시원 3층은 방화문이 뜯겨 있었고 4층은 나무로 돼 있어 피해가 더 컸던 것으로 감식반은 추정했다.
사고 원인은 ‘방화’ 또는 ‘실화’
화재 당시 노래방에 있었던 주인 정모씨는 경찰 조사에서 “가게에 들어가 잠을 자다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서 2명을 구해준 게 전부”라고 진술했다.감식반은 건축법위반·용도변경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장 감식에는 경찰과 국과수 외에 소방서, 한국전기안전공사, 한국가스안전공사 등 관계 기관에서 나온 전문가 20여명이 참여했다.
한편 서울 경찰병원과 서울의료원 등에 마련한 고시원 희생자 빈소에는 안타까운 사연들로 가득했다.사망자로 확인된 손모씨는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아내와 초등학생 자녀 2명을 두고 혼자 고시원에 살았던 ‘생계형 기러기아빠’였다. 손씨는 학원 영어강사였던 아내 이모씨와 결혼한 뒤 쌍둥이 딸(9)을 낳고 아내와 잡화점을 운영하다 외환위기로 사업을 접었다. 이후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부인에게 피부마사지실을 차려줬다.
한동안 친구의 오피스텔에서 지내온 손씨는 6개월 전부터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운전연수 교사 일을 해왔다.또 다른 사망자 배모(44)씨는 혼기를 놓치고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다 좀 더 안정적인 일을 하고자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려고 1년 전 고시원에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화재사고를 수사 중인 경찰은 이번 화재의 원인이 방화 또는 실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주목된다.
경찰은 브리핑에서 “국과수 1차 감식을 통해 노래방 소파가 발화 지점인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소파에 전기나 가스가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불이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사고 직전까지 이 소파에서 자고 있었던 노래방 업주 정 모씨를 서울경찰청으로 불러 당시 행적 등에 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정씨가 지난 19일 1차 조사에서 화재 당시 노래방에 있었으면서도 불이 난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이날 2차 조사에서는 거짓말 탐지기와 최면수사 기법까지 동원해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확인 중이다. 경찰은 소파 옆에 담배꽁초가 들어있는 종이컵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담뱃불이 소파에 옮겨 붙어 불이 났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경위를 캐고 있다. 경찰은 “정씨가 사고 시간대에 혼자만 있었는데 불이 났다.
19일 오후 3시41분 정씨가 간판수리업자와 만난 뒤 3시50분께 119 화재신고가 접수됐는데 이 9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수사력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대형 참사로 이어진 고시원 화재로 인해 ‘원조 고시촌’인 신림동 일대에도 화재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신림동 윗동네의 값싼 고시원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차가 한 대라도 주차돼 있으면 소방차가 진입하기 불가능한 좁은 도로에 밀접해 있다.
세 끼 식사까지 포함해 한 달에 25만원으로 ‘쪽방형’ 고시원에 기거하며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이모씨는 “잠실 고시원 사고를 접한 순간, 창문도 없는데 불이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퍼뜩 들더라”며 “불안하긴 하지만 돈이 없으니 별수 있냐”고 말했다.서울 관악구 일대의 고시원은 모두 625개. 이 가운데 500여개가 신림9동 고시촌에 들어차 있다.
용도변경 등 불법 집중단속
사정이 이렇듯 다급한데도 다중영업소로 분류된 고시원의 시설 개선은 요원하다. 방마다 비상벨을, 건물에는 비상구와 간이 스프링클러 등을 설치해야 하는 등 소방·방화시설을 강화한 개정 소방법은 사업자들의 반발로 내년 5월로 시행이 미뤄졌다.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대형 참사보다 사업주의 이익이 우선 고려된 것이다. 한편, 정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불법 용도변경을 통해 숙박업 형태의 고시원으로 사용하는 영업장에 대해 강력한 단속을 벌일 계획이다.
<강훈 프리랜서> kanghun@ilyoseoul.co.kr
최근 연속 발생한 고시원 화재 사건들“불나면 끝장…” 고시원은 화재에 ‘무방비’
최근 화재는 고시원 등 취약 시설에서 집중적으로 발생, 인명과 재산피해가 늘어나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인재(人災)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시원은 대부분 1∼2평 규모의 30∼50개의 방이 벌집처럼 칸막이로 되어 있다.
소방법 시행규칙에 신종 다중이용시설로 분류돼 있지만 관련규제가 없는 자유업종이어서 화재 등 각종 대형 안전사고에 노출돼 있기도 하다. 특히, 고시원은 적은 돈으로 수개월 묵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나 극빈자, 범죄자 등이 숙박시설로 이용, 규제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1월 15일 오전 9시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1동 M상가 5층 고시원에서 화재가 발생, 10여 평을 태웠다. 이날 불로 소파 등 집기류와 건물내부 손실로 250만원(소방서 추산)의 재산피해가 났으나, 고시원 거주 20여명은 긴급 대피해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작년 12월 6일에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나 자고 있던 최모(여·28)씨가 숨졌다.
불은 최씨가 잠들어 있던 1.5평 규모의 방 등 고시원 쪽방 5개를 태우고 20여분 만에 진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2월 2일 오전 4시 6분께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고시원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6층짜리 고시원 건물 5층에서 불이 나 방 2개를 태우고 120만원(소방서 추산)의 재산피해를 낸 것. 화재는 소방대에 의해 20분 만에 진화됐다. 이 불로 고시원에 살던 80여명이 긴급 대피했으나 불을 피해 창밖으로 뛰어내리던 20대 여성 두 명이 각각 허리부상과 화상을 입는 등 모두 6명이 다쳤다.
최근 발생한 잠실동 고시원 화재로 인해 2004년 1월 12일 수원 고시원 화재가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이 화재는 새벽 2시께 수원 M고시원에서 투숙객 마모(31)씨가 켜둔 촛불로 불이 나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했던 참사로, 불이 난 마씨의 방과 붙은 통로가 1m 정도로 좁은 곳인데다 북쪽과 남쪽 비상구 가운데 위치, 이 통로에 설치된 방의 투숙객들이 연기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해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가 발생했던 대부분의 고시원들은 내부 벽과 문이 모두 나무로 돼 있고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던 것으로 드러나 대형 참사는 어쩌면 예고돼 있었던 것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또 이들 고시원이 위치한 곳도 공장이나 유흥업소, 일용직들이 몰려 있는 시장 등이어서 대형 인명피해의 우려를 안고 있다.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