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빼고 다 모여라”
2006-09-10 이금미
김대중 전대통령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향후 정계개편에 영향력을 행사할 태세다. 징후는 2003년 분당 이후 과거 민주당 인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에서 시작된다. 지방선거 이후 정계개편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는 작금의 시점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두 개의 축으로 나뉘어 정계개편의 물밑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DJ의 등장으로 인해 정치권이 지각변동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범여권 분열인가 단일화인가의 선택의 시간, DJ의 복심(腹心)이 대소를 결정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정계개편의 쏠림 현상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DJ는 공식적으로 여전히 정치개입 불가 입장이다.
하지만, DJ의 등장은 언제나 긴 여운을 남긴다. 지난 12일 오랜만에 언론에 얼굴을 공개한 DJ는 기존의 정치개입 불가 입장을 이렇게 풀어냈다. “제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동지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을 잘 하도록 개인적으로 만나면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반노·비한나라당 연합’에 힘 실어
이를 계기로 호남세력 중심의 ‘구여권 통합론’에 대한 교감 여부가 관심사로 부상중이다. 지방선거 직후부터 양당의 통합 문제 등 정계개편 논의가 활발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짚어볼 대목은 범여권의 통합 논의의 방향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데 있다. 한 축은 민주당에서 추진하고 있는 ‘반노·비한나라당 연합’이다. 민주당에선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을 전제조건으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일부를 포함한 신당 창당을 계획하고 있다. 이른 바 “노무현만 빼고 헤쳐모여”다. 이들의 시각에서 구여권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의 최대 변수는 노 대통령의 탈당에 있는 게 사실이다. 또 하나는 노 대통령을 비롯해 우리당 친노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방식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전선의 성격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민주당의 요구대로 노 대통령이 탈당하지 않는다는 것. 이른 바, ‘외부 선장론’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당은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참여경선제) 도입을 공식 선언하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모든 정파의 지도자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경계도 적도 명확지 않다. 하지만 외부세력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정치권을 아우르는 ‘대연합’을 시도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사실, ‘외부 선장론’이 등장하기까지 정계개편의 방향은 노 대통령의 탈당을 계기로 전개될 것이라는 관측이 높았다. 그동안 민주당과 우리당의 통합의 방식과 지분 분배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역대 정권 말기 대통령의 탈당이 관행처럼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정권재창출에 대한 노 대통령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당 내 통합 내지 합당을 요구하는 이들이 상당수임을 모를 리 없는 노 대통령이다. 지방선거 이후엔 당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노 대통령의 탈당을 주문하기도 했다.
‘통합’에 동교동계 ‘힘’ 쓴다
이러한 시점에서 DJ가 동교동계 인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다. 동교동계는 지난 12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나 ‘DJ의 도쿄 피랍 생환 33주기’ 축하 모임을 열었다.
짚어볼 대목은 또 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에 적을 갖고 있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면면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인사는 이석현 정동채 배기선 염동연 의원 등이다. 애초 문희상 의원도 참석하기로 했으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불참했다는 후문이다. 민주당 인사는 한화갑 대표와 김옥두 정균환 이윤수 설훈 전의원, 임동원 신건 전국가정보원장, 정세현 전통일부 장관, 박광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남지사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2003년 분당 이전의 민주당 모임을 떠올리기도 했다. 물론 동교동계 인사들은 “DJ의 생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일 뿐”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모인 자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문제는 몇몇 인사들을 제외한 참석 인사들 대부분은 향후 자신들을 중심으로 정계개편 논의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이날 모임의 상징성 역시 민주당 분당 이후 양당의 동교동계 인사가 공식적으로 모인 첫 자리라는 데 있다. 특히 배기선 의원은 다음 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에 동교동계가 힘을 쓸 수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배 의원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동교동계 움직임의 전제조건은 역시 노 대통령의 탈당이다. 동교동계는 DJ의 복심(腹心)이다. 따지고 보면 17대 총선을 기점으로 몰락했던 동교동계의 부활이다. 물론 정치권과 동교동계의 다리는 DJ다. DJ는 여전히 호남권과 민주화 세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가 약하지만 DJ의 적자임을 자부하고 있는 민주당마저 DJ가 지원할 경우 정권창출도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군소 후보 합종연횡 막는다
DJ의 등장은 우리당 내부 호남권에 정치적 뿌리를 두고 있는 의원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칠 태세다. 이들은 노 대통령이 그리는 차기 정계개편 구상에서 호남이 후순위로 밀릴 ‘경우의 수’에 대비하고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DJ와 노 대통령의 결별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 동교동계 출신인 우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선택의 순간이 오면 DJ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다. 노 대통령이 그리고 있는 구상을 검증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우리당이 겪고 있는 최악의 상황도 DJ의 향후 복심의 방향을 예측케 한다. 우리당에 대한 낮은 지지도는 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구도로 대권이 치러진다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분위기다. 게다가 여권의 대권주자 입지도 그리 녹록지 못한 게 현실이다. 잠재적인 여권 주자라던 고건 전국무총리마저 부동의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최근 들어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 전서울시장과 박근혜 전대표에 밀리는 양상이다. 때문에 여권 후보 중 대망론을 품고 있는 인사라면, 대권레이스를 질주하기 위해선 DJ만한 든든한 후원자도 없는 게 사실이다. 물론 한나라당 후보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때만 되면 동교동 문턱을 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때문에 DJ가 그리는 정계개편은 대권주자를 지지하는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이 구체화되는 시점이 그때다. 통합이든 분열이든 정계개편의 전주곡은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울리며, 한나라당이 절대적 우세에 있는 가운데 현 구도에서 다른 세력이 대권을 잡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DJ의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군소 후보들의 합종연횡을 막고, 반노·비한나라 연합에 무게를 싣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노무현 빼고 다 모여라”인 셈이다.
#모든 길은 ‘광주’로 통한다?
민주당 vs 우리당 ‘맞고소’ 전쟁터 광주
앙금 걷어내고 화해 길목 접어들어
“사사건건 대립하던 광주의 모습은 잊어 달라.”
민주당의 박광태 광주시장과 열린우리당 광주지역 국회의원들이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를 계기로 내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위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박 시장과 정동채 양형일 김태홍 의원 등 국회의원 6명은 지난 18일 광주시청 상황실에서 정책간담회를 열었다.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할 주요 사업을 협의하는 형식을 빌려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박 시장과 우리당 의원들 대부분은 민주당 시절 동지들이다. 박 시장은 인사말에서 “불초 시장한테 부족한 점이 많이 있더라도 의원들께서 지도하고 협조하는 마음으로 이끌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우리당 의원들을 향해 몸을 낮췄다. 지역의 국회의원을 대표하고 있는 정 의원도 “의원 7명이 광주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며 “광주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최근까지 박 시장과 광주지역 우리당 의원들은 맞고소를 하며 감정의 골을 키워왔다. 17대 총선 뒤 문화수도 추진과 사업예산 확보의 공적을 둘러싼 다툼 등, 민주당 분당의 후유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방선거가 끝나면서 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이 거론되며 딱딱해진 앙금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또 지역 시민단체의 비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달 안에 소송을 일괄 취하하기로 잠정합의한 것이다. 정치적 화해모드로 변경된 호남의 뿌리 광주는 ‘노무현 정권’ 탄생의 시발 지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