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공천비리 파문
박근혜 ‘레임덕’ … “올 것이 왔다”

2006-04-18     이금미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공천비리 파문이 정치권을 흔들고 있다. 당내 중진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불법 선거자금 수수 혐의로 한나라당은 벌집 쑤신 듯하다. 그러나 당내 바닥정서는 “올 것이 왔다”며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당내 곳곳에선 “더 큰 건이 터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 ‘공천=당선’이라는 등식으로 임한 공천혈투가 빚어낸 결과라는 얘기다. 사태의 심각성에서 지방선거 결과는 물론 대권주자 정치지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벌백계를 경고했음에도 검찰 고발이라는 초강수를 띄울 수밖에 없는 박근혜 대표의 조기 수습이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지방선거 공천은 차기 전당대회를 염두에 둔 중진 의원들의 당대표 경선을 위한 전초전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공천비리 파문이 ‘황제 테니스’로 물의를 빚은 이명박 서울시장에 유리한 지형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결국, 임기 3개월을 남겨둔 ‘박근혜 레임덕’이라는 결론이다. 박 대표는 공천비리를 스스로 밝힘으로써,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미 한나라당 주변엔 제2의 김덕룡·박성범 의원을 지목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진급 의원들과 관련된 공천비리가 더 있다는 얘기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인해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도 관심사로 부상했다.

금품수수에 대한 구체적 정황, 녹취, 각서 등 공천에 이은 당선과 관련된 소문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텃밭인 수도권과 영남지역에선 ‘공천 공정가’라는 말도 등장했다. 기초의원 1억∼3억원, 광역의원 3억∼5억원, 기초단체장 10억∼15억원. 특히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공천비리와 관련된 소문은 지역정가를 흔들고 있다. 때문에 현역의원을 비롯해 당원협의회운영위원장 등 공천에 가까이 있는 인사들은 ‘소문 해명’에도 나선 상태다. 이미 곽성문·한선교 의원 등은 제보를 통해 경찰에 접수됐다. 그만큼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한나라당 공천비리가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얘기다.

‘임시 사무총장’체제가 사태 불러

이는 이번 공천비리 파문이 박 대표의 ‘책임론’으로 모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위안대로 공천권을 중앙당의 통제밖에 둬서 공천비리가 생겼다는 데 이견은 없다. 박 대표 역시 공천잡음이 불거질 초기 무렵부터 중앙당 차원에서 ‘클린공천감찰단’을 가동하고, 일벌백계의 의지를 밝혔다. 비리의 덩치가 커진 것을 두고 박 대표의 책임이라는 당내의 시각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닿아 있다. 바로 ‘사무총장’의 역할이다. 이는 ‘최연희 성추행 파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무총장이란 어떤 자리인가. 중앙당의 살림을 책임지고, 다양한 정당 행사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곳이다. 또한 크고 작은 선거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기능도 맡고 있다.

잔일이 많으면서도 그만큼 권한도 막강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선거 직전 한나라당은 사무총장이 갑작스레 교체되는 불운을 맞았다. ‘성추행 파문’으로 낙마한 최연희 의원의 바통을 이어받아 현재 허태열의원이 사무총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나, 임시 사무총장인데다 임기도 보장되지 않는다. 때문에 공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현역의원이나 당원협의회운영위원장, 이를 따내려는 예비정치인들이 ‘중앙당(사무총장)’의 감시기능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대세를 이룬다. 여기에 허 총장의 리더십이나 카리스마의 존재 여부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따지고 보면 최연희 성추행 파문의 책임은 박 대표를 비롯한 현지도부에 있다는 결론이다.

차기 당대표 파워게임 ‘치열’

한나라당의 바닥정서를 통해 이번 파문을 진단하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속내도 ‘박근혜 책임론’에 가깝다. 이른바 ‘박근혜 레임덕’이다. 박 대표는 유력한 대권주자지만 임기를 3개월 앞두고 있다. 지방선거 직후 ‘상임고문’으로 지도부에서 멀어져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게 된다. 당권과 대권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한 핵심당직자는 지금의 박 대표가 처한 상황을 빗대 ‘박근혜 꽃가마엔 박근혜가 없다’고 진단했다. 물론, 지방선거 직후 정치권이 대선정국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7월 지도부를 전면 교체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지도부 진입을 노리는 중진급 인사들이 전당대회를 염두에 두고 세확산에 나서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7월 전당대회에선 지방선거를 통해 제도권에 진입한 광역단체장 및 기초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원 구성원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다. 또한 과거 ‘사고지구당위원장’이라 할 수 있는 당원협의회운영위원장 예비후보 모집이 지난 1월부터 시작됐으나, 자기사람을 심으려는 중진의원들의 물밑다툼이 심해 몇 개월간 늦춰지고 있는 일련의 과정은 당내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 공천은 차기 당대표를 가르는 전초전 성격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는 김 의원의 ‘정계은퇴’가 정치권에 안겨주는 충격과도 무관치 않다. 김 의원은 일찌감치 차기 당대표 물망에 올랐던 인사다. 김 의원 주변에선 ‘박근혜-김덕룡-손학규’를 중심으로 한 차기 역학구도가 오랜 전부터 흘러나오기도 했다.

반면, 이 시장 진영에선 친박근혜 세력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김무성 의원을 제치고 원내대표에 오른 이재오 대표 출마설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정치적 기로에 놓인 박 의원과 김 의원의 인연도 흥미롭다는 것 역시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이다. 박 의원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 의원의 영입에 의해 정계에 입문했다. 결국, 지난 연말부터 박 대표 및 현 지도부가 아닌 차기 당대표 후보들을 중심으로 한나라당이 운영돼 왔다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박근혜 레임덕 기간 차기 당대표직을 건 ‘파워게임’이 오늘의 사태를 빚었다는 것. 이 시장 입장에선 손도 안대고 코를 푼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