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부메랑에 대권주자 입지 흔들

2005-01-06     <홍성철 
4대 개혁법안 후폭풍이 여권을 강타하고 있다. 천정배 원내대표가 1일 새벽 전격 사퇴한데 이어 3일에는 이부영 당 의장 등 지도부가 사퇴서를 제출했다. 4대 개혁법안의 연내처리 실패에 따른 내홍이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지난 4·15총선을 통해 거대 여당으로 거듭난 열린우리당의 원내사령탑으로 등극한 천 전대표의 낙마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천 전대표는 원내대표 경선 과정에서 ‘첫째도 개혁, 둘째도 개혁, 셋째도 개혁’이라는 ‘선명 개혁론’을 내세워 당시 ‘안정적 개혁론’을 주창한 이해찬 후보를 누르고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하지만 천 전대표의 이러한 선명 개혁론이 8개월만에 그 막을 내리면서 여권의 개혁 드라이브에도 제동이 걸리게 됐다. 여기에 4대 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권내 이념 갈등은 향후 당권 및 대권경쟁 과정에서 적지않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집권당 원내대표 등극이후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올랐다가 개혁 부메랑에 휘청거리고 있는 천 전대표의 인생 유전과 정치 역경을 되짚어 봤다. 목포가 배출한 3대 천재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 천 전대표는 여권내에서도 대표적인 소신 개혁주의자로 통한다.목포시에서 서쪽으로 약 25㎞ 떨어져 있는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천 대표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명문중학교였던 목포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아이들 사이에서는 암태도에 사는 천정배라는 아이가 수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음악, 미술 등 예능 과목을 제대로 못 배운 천 대표는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목포중학교에 입학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중학교 입학후 우수반에 배치된 천 전대표는 당시 문학가가 돼야 겠다는 포부를 잠시 가졌다. 전남 학술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이 그에게 문학도의 꿈을 키워준 계기가 됐다. 또 이러한 꿈과 포부는 이후 서울대에 입학할 때까지 수석 입학과 수석 졸업을 거듭하는 그야말로 ‘수석 인생’의 단초가 됐다.천 전대표가 목포가 배출한 3대 천재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는 것도 이러한 ‘수석 인생’과 무관치 않다. 목포고 졸업후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한 천 대표는 졸업전인 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천 전대표는 사법연수원 수료후 판·검사의 길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천 전대표는 “엄밀히 말하면 판검사가 되기 싫었다기 보다는 그 임명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연수원 성적이 3등이었던 만큼 판·검사를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전두환이 주는 판·검사 임명장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처럼 천 전대표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연수원 수료후 공군 법무관 시절에 접한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을 읽고난 후부터다. 뒷골목의 양아치와 건달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접한후 “은연 중에 배어있던 엘리트 의식이 여지없이 무너졌다”고 천 전대표는 회고하고 있다. 이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 대학시절에도 읽지 않았던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했던 시절도 바로 군 법무관 시절이었다.군 법무관 복무를 마친 천 전대표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에서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년간 주로 국제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이후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와 ‘남대문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소하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창립후인 지난 90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닫고 월급 100만원을 받는 상근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노무현 대통령과의 첫 인연은 중견 법무법인인 ‘해마루’에서 맺어졌다. 92년 개소한 ‘해마루’는 천 전대표와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이 창립 멤버이고, 노 대통령은 1년 뒤인 93년 합류했다. 이후 노 대통령이 98년 부산으로 내려갈 때까지 6년 동안 함께 활동해 온 이 세 사람은 동료 변호사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지난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천 전대표가 현역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던 것도 이러한 인연에서 기인한다. 또 임 의원은 95년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통추의 주축이던 노 대통령을 적극 지원한 바 있다.이처럼 인권변호사 길을 걸어온 천 전대표는 지난 96년 15대 국회때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목포가 고향이었던 만큼 당시 민주당 실세그룹이었던 동교동계의 후광을 업고 15대 국회 진출에 성공한 것. 하지만 동교동계와 혈액형이 달랐던 그는 이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16대 국회때 재선에 성공한 이후에는 정치행보에도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는 정동영·신기남 의원 등과 함께 2000년 4·13총선이후 불거진 민주당내 쇄신·정풍운동을 주도했다. 2001년 2월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 출마한 천 전대표가 낙선한 배경에는 당시 당내 최대 주주였던 동교동계에 밉보였기 때문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총무 경선에서 낙선한 천 전대표는 당시 측근들에게 “시험이나 선거에서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재기를 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천 전대표는 또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에는 목포고 선배인 한화갑 후보나 ‘대세론’을 굳혀가던 이인제 후보 대신 유일하게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원칙과 소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그는 “국가적 리더십을 수평적 관계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노무현 밖에 없다”며 노 후보 지지 배경을 설명했다. 결과론이지만 천 대표의 선택은 적중했고, 민주당은 잇달아 두 번이나 대통령을 당선시킨 명문 정당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천 전대표의 개혁 의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천 전대표를 비롯한 이른바 ‘천-신-정’ 트리오는 참여정부 출범이후 줄기차게 당 개혁을 주창했고, 당 개혁을 둘러싼 신·구 갈등은 급기야 신당론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들 소장파 3인방은 당내 구주류측으로부터 ‘탈레반’이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이들의 개혁 의지는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이어졌다.이처럼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이자 당권파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천 전대표는 4·15총선 이후 치러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때 소장 개혁파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원내사령탑에 등극했다. 당내 최대 계보인 당권파 리더에서 일약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집권 여당을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거듭난 것.

그의 당내 입지 및 대외적인 정치적 위상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권 관계자들이 정동영 김근태 이해찬 등 여권내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천정배’라는 이름 석자를 올려 놓았다는 사실에서 높아진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하지만 천 전대표의 이러한 거침없는 행보는 4대 개혁법안 후폭풍에 휘말리면서 급제동이 걸리게 됐다. ‘선명 개혁론’을 앞세워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만큼 4대법안 연내처리 무산은 그가 떠안아야 할 무거운 짐으로 돌변했다. 1일 새벽 천 전대표가 4대법안 연내처리가 무산된 직후 스스로 사퇴한 것도 자신이 떠안아야 할 짐의 무게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