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민’은 차기 대권도전 구상중
2005-06-08 언론인=김은미
각종 여론조사 1위 부각
고 전총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는 1위를 굳히고 있다. 한 시사주간지가 최근 실시한 전문가 집단 여론조사에서 고 전총리는 차기 대선 후보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김근태 장관과 이명박 서울시장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번 결과는 일반 여론조사가 아닌 학계 등의 오피니언 리더를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앞서 <동아일보>가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에서도 고전 전총리는 31.6%로 2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24.6%)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에서 이명박 서울시장과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각각 13.7%와 8.1%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고 전총리의 대권레이스 선두 질주는 이미 지난해를 거쳐 올 초에도 확인된 바있다. <국민일보>가 올 초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고 전총리는 29.8%를 차지, 박 대표(17.8%)와 정 장관(10.0%)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고 전 총리의 강력한 1위 질주는 ‘안정감’ 때문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일관된 분석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국정수행 만족도가 80%를 넘었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현 정권의 ‘불안정성’에 국민들이 ‘대체재’를 찾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고 전 총리 본인 역시 차기 대권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 일각에서는 고 전 총리의 약점으로 정권을 획득하겠다는 권력 의지나 그가 안고 있는 과거행보가 대권가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대통령 6명 상대한 처세술의 달인
최연소 내무부 지방국장(35), 최연소 전남지사(37)에 무려 6명의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고 국정을 논의했던 행정의 달인으로 잘 알려진 고 전총리는 일찍이 능력을 인정 받아 80년대 초부터 정치권으로부터 호남의 대표적인 5대인물 중 한명으로 꼽혀 왔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전북대총장을 지낸 고형곤 박사가 선친으로 화려한 명문가 집안 출신이다. 전북 옥구가 고향인 선친은 63년 야당인 민정당 초대 정책위의장을 지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대 철학과 제자이면서 민정당 생활을 같이하기도 했다.고 전 총리는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창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으나 6·25가 나는 바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전주북중을 다녔다. 그러나 졸업은 부산으로 피난간 경기중학에 복교, 그곳을 졸업했고 그때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며 경기고에 입학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3학년 재학중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총학생회장을 지낸 고 전총리는 행정고시까지 합격하는 등 최고의 엘리트 코스만을 밟았다. 젊은 나이에 전남지사로 발령이 난 고 전총리는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남의 돈을 받지 말라. 누구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라. 복잡할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는 집안 가훈을 몸소 실천했다. 고 전총리가 오랜 공직생활 과정에서 한번도 비리나 금전과 관련한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청렴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소신있는 공직자 평가
88년 서울시장으로 재직중 수서 택지 특혜분양을 둘러싸고 청와대 등의 외압에 굴하지 않아 전격 경질됐을 때 그는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소신 있는 공직자라를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때는 전남지사와 청와대 정무2비서관을 지냈으며 최규하 대통령 시절엔 정무수석비서관, 전두환 정권때는 교통·농수산·내무부장관, 그리고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서울시장을 거쳐 김영삼 정권때 국무총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에선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고 전 총리는 자신의 능력과 지자이렴(知者利廉=현명한 사람은 청렴이 이롭다는 것을 안다)이라는 공직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정권을 두루 거친 고 전총리의 이력에 대해 비판적 시각도 적지 않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 발탁설이 나돌자 당시 여권의 한 고위인사는 그 사람이 몸바쳐서 대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임기 마지막 총리로서 부적절하다는 평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 환란 위기시 총리였던 그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는 점과 한 정권의 마지막 총리가 새 정권의 시장으로 다시 등장한데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화려한 경력 이면에 약점도 적지 않아 고 전총리의 화려했던 과거행보는 그의 대권행보에도 적잖은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이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됐던 그의 약점과 무관치 않다.
병역면제 의혹 꼬리표
노무현 정부 초대 총리를 지냈던 고 전총리는 당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고 전총리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병역면제 의혹 등이 불거졌던 것. 당시 고 전총리는 자신의 병역면제 의혹과 관련해 “당시엔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미하령(未下令)상태였다. 당시 징집대상자 35만명 중 18만명에게만 영장이 발부됐다는 사실이 병무청장 보고에서 밝혀졌다”고 해명한 바 있다. 고 전총리의 차남이 84년 7월 징병검사에서 1급판정을 받았으나 87년 5월 재검사에서 면제 등급인 5급판정을 받은 것과 관련한 의혹도 끊이질 않고 있다.
80년 5·17 계엄확대 당시 행적을 비롯한 고위관료로 재직한 시절 미심쩍은 행보도 고 전총리의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80년 5·17 계엄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고 전총리는 5·17 직후 한동안 출근을 하지 않아 ‘신군부에 사실상 동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 왔다. 그러나 고 전총리는 “당시 비상계엄 확대를 위한 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는 곧 군정(軍政)을 의미한다고 판단해 회의 참석을 거부하고 사표를 낸 뒤 자택에 칩거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고 전총리가 군 출동과 위수령 발동을 건의했다는 의혹도 불거진 바 있다. 이에대해 고 전총리는 “부산에서 위수령 발동을 문의해 왔지만 내무장관으로서 군이 나오는 불행한 사태를 막았다”며 반박하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97년 6·10 민주화운동 당시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을 당시 내무장관이었다는 점, 90년 수서사건과 관련된 의혹, 97년 외환위기 당시 국무총리였다는 점 등도 여러 차례 검증대상이 되곤 했다.따라서 고 전총리가 대권에 공식적으로 출마할 경우 공직 및 관직 재직 당시의 행보와 관련한 갖가지 구설수가 최대 이슈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고 전 총리는 89년 관선 서울시장 시절 국정감사에서 수의계약과 관련해 특혜의혹이 일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시청입구 사무실 한곳에 ‘공사계약 시민열람실’ 간판을 내걸고 공사계약 서류와 장부 일체를 1년여 동안 비치한 사실이 있다.
추진력 부재 지적도
2001년 7월 서울시장 재직 시절에 추진했던 서울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 사업과 관련한 뒷말도 무성했다. 당시 화장 문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고 전총리는 추모공원을 당초 강서구에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강서구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추모공원 부지는 서초구로 장소가 옮겨졌고, 다시 서초구 주민들이 반발하자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 착공도 못한채 퇴임하고 말았다.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하자가 없는 사업을 주민 반발을 이유로 답보상태에 머물게 했던 것. 그래선지 정치권 관계자들은 고 전총리가 ‘안정감’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대권전에 본격적으로 나설 경우 이같은 약점들이 수면위로 재부상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난관을 고 전총리가 어떻게 헤쳐나갈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