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처럼 이름빛낸 ‘선동렬식’ 야구의 힘!
2005-10-25 유승호 프리랜서
그는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도 항상 최고 투수였고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한 뒤에도 성공일로를 걷고 있다. 지난해 삼성 수석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선 감독은 지난 겨울 김응용 감독이 전격적으로 구단 사장으로 취임하자 사령탑에 올랐다. 준비기간이 짧을 것이라는 우려를 뒤로 하고 선 감독은 개혁의 칼날을 과감하게 휘두르며 삼성 팀컬러를 바꿔놓았다. 열매는 달콤했다. 그는 프로야구 24년 사상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최초의 초보 감독이 됐다. ‘최고 선수는 최고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을 통쾌하게 뒤흔든 선동렬의 리더십을 살펴본다.
투수력 강화가 승리견인
선 감독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지 않는다. 복잡하게 돌려 말하는 법도 없다. 선 감독은 솔직함과 당당함을 무기로 삼성 선수들을 빠르게 장악했다.삼성은 1982년부터 최강 선수들을 갖추고도 2001년까지 단 한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동안 5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번번이 패퇴. 삼성에는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양준혁 마해영 이승엽 등 슈퍼스타들이 워낙 많았고, 그들의 개성은 서로 충돌하느라 바빴던 탓에 팀워크가 모래알 같았다.삼성은 김응용 감독이 이끌었던 2002년 이승엽과 마해영의 극적인 홈런포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그렇다고 큰 경기에 약한 삼성의 팀컬러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삼성은 2003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졌다.
이후 삼성이 택한 카드가 선동렬이었다. 선 감독은 지휘봉을 잡자마자 양준혁의 1루 미트를 빼앗고, 최고 3루수였던 김한수를 1루수로 돌렸다. 포수 진갑용에게는 “네 도루 저지율이 올라가면 팀 승률은 떨어진다. 욕심을 버리고 투수 위주로 볼배합을 하라”고 명령했다. 최고 선수들의 포지션과 마인드를 흔들어놓은 일대 변혁이었다.모든 감독은 스타들의 개인주의를 잘라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감히’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역대 삼성 감독들은 자신보다 몇 배의 연봉을 더 받는 스타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지만, 선 감독이 소신있게 개혁을 실행하자 선수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라.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선수라도 선 감독 만큼 야구를 잘 했던 이는 없다.선 감독은 부진하다 싶으면 심정수나 양준혁도 7번 타순으로 내렸고, 라인업에서 아예 빼기도 했다. 에이스 배영수를 한국시리즈 1차전이 아닌 2차전 선발로 기용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다.
선 감독은 배영수에게 1선발 자리를 발탁하며 “이기기 위한 선택이다. 내 말을 듣고 잘못된 적이 있느냐”라고 했다. 선 감독은 “역대 삼성 감독을 지내셨던 선배들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된다. 언제까지 스타플레이어에 끌려 다닌다면 이 팀의 미래는 없다. 정치에 비유하자면 조금씩 개혁의 칼날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선 감독의 권위는 때로 독이 되곤 했다. 처음엔 숨죽이던 선수들이 조금씩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선 감독은 “이름값으로 야구할 생각은 말라. 실력 위주로 선수를 기용하겠다” “심정수와 양준혁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서 상대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다” 등 솔직한 말들을 쏟아내며 소신을 지켜갔다.선 감독은 스타들을 휘어잡는 동시에 잠재력 있는 신예들에게는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김한수를 1루수로 돌려 공백이 생긴 3루 자리에 조동찬을 중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 또한 단국대를 졸업하고 올해 입단한 오승환을 초반부터 불펜투수로 쓰더니 시즌 중반 마무리 권오준이 부진하자 과감하게 뒷문을 맡겼다. 안지만 임동규 김덕윤 등 젊은 투수들도 ‘태양의 정기’를 받고 성장한 케이스다.
‘이기는 야구’ 노하우 터득
선 감독의 지휘 스타일을 두고 전문가들은 엇갈린 평을 내놨다. 강한 카리스마는 스승인 김응용 감독을 빼닮았다는 말이 있었고, 거침없고 냉정하게 선수들을 평가하는 면은 주니치 감독이던 호시노와 비슷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투수력과 수비력을 유난히 중시하는 점은 전체적으로 일본에서 배워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그러나 선 감독은 이런 시각들을 모두 부정한다. 선 감독은 “두 감독을 모셨고, 일본에서 야구를 하긴 했지만 누구를 닮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름대로 이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 스타일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선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야구관은 명확하다. 그는 선수 시절부터 그랬듯 ‘이기는 야구’를 절대적으로 추구한다. 투수들이 경기를 이끌어 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타자들은 타격 욕심보다는 수비에 더욱 신경 쓰도록 했다.
해태 시절 삼성을 숱하게 꺾으며 얻은 교훈을 삼성의 지휘봉을 잡아 실현한 것이다. 선 감독은 취임과 동시에 투수력 강화에 온 힘을 쏟았다. 외국인 선수 2명을 모두 투수로 채웠고, 배영수 권오준 등 주축 투수들을 직접 챙겼다. 시즌 전 선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10-5로 이기느니 2-3으로 지자”고 역설했다. 타자들에게는 자존심 상할 말이었지만, 방망이에 의존해 왔던 삼성의 전통을 깨기 위한 힘찬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투수들에게 부담만 준 것은 아니었다. 선발 투수들이 초반에 흔들려도 가능하면 5이닝 이상을 던지도록 배려하면서 승리투수가 될 기회를 줬고, 불펜 투수들의 투구수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절했다.
1위가 확정된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날에는 배영수가 탈삼진 부문, 오승환이 승률 부문 타이틀을 따도록 밀어주기도 했다.타자들에게는 세밀한 야구를 주문했다. 팀배팅과 히트앤드런 등 작전 수행능력이 부족한 삼성 타자들로는 한국시리즈 같은 큰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선 감독은 타자들에게 홈런 욕심을 버리고 필요할 때 1~2점을 짜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시즌 삼성의 팀 홈런 수는 예년에 비해 절반 정도 줄었지만, 도루·번트·히트앤드런 등 다양한 작전이 두 배 이상 늘었다. 덕분에 삼성은 한국시리즈 1,2차전에서 선취점을 빼앗기고도 차분히 따라잡아 역전승을 거뒀고, 3,4차전에서는 화끈한 공격력으로 대승했다. 장타가 터지지 않을 상황을 가정해 팀을 재건한 결과였다.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치르며 “지도자로서 제2의 야구인생을 이제 막 시작했다.
선수 때는 나만 잘 하면 됐지만, 감독이 되니 여러 가지를 신경쓰느라 머리가 아프다”고 고백했다. 이 말은 김응용 사장이 “선동렬은 선수 때는 게을렀는데 지도자가 되더니 아주 부지런해졌다”고 평가한 것과 맥이 맞닿아 있다.선 감독은 한국시리즈 승장 인터뷰 때마다 올시즌을 치르면서 강조해왔던 말들을 되풀이 했다. 특히 시즌 중반 타선 침체로 고비를 맞았을 때 한국시리즈에서는 그런 경험이 어려운 경기를 풀어갈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말을 몇 번씩 꺼냈다. 위기속에서도 우승을 위한 큰 그림을 그려왔다는 점을 표출한 셈이었다. 이렇게 선 감독은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팀을 이끌었고,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홈런욕심 버려라
지난해 삼성 유니폼을 입은 것만 봐도 선 감독이 얼마나 ‘이기는 야구’를 맹신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고향팀 기아 타이거즈나 서울팀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를 선택하지 않고, 현역 시절부터 적대 관계에 있던 삼성에 몸을 담은 이유는 단 하나, 이기기 위해서다.82년부터 2001년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기까지 9차례나 감독을 갈아치웠던 팀이 삼성이다. 우승하지 못하면 누구도 버릴 수 있는 삼성을 선 감독이 택한 이유는 선수단에 충분한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다. 선 감독은 삼성 감독에게 주어지는 부담과 스트레스를 감내하더라도 우승할 수 있는 팀을 지휘하고 싶었다.삼성은 감독으로서 검증되지 않은 선 감독과 5년 계약을 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어떤 선수도 선 감독을 거역할 수 없도록 만든 것. 선 감독은 “성적이 안 나면 스스로 옷을 벗겠다”고까지 하며 과감한 개혁을 수행해 갔다. 그리고 이기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조합한 결과, 부임 첫해 기어코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아직 ‘지도자 선동렬’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선 감독은 누구보다 힘찬 첫 발을 내디뎠다. 첫 시즌의 대성공으로 그의 소신과 지도력에 한층 힘이 실릴 것이 분명하다. 이미 충분히 높아 보이는 ‘태양의 고도’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