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에서 이기면 대선에 도전, 지면 깨끗이 승복하겠다”
2006-05-17 이영하·언론인
이전까지는 같은 질문이 나오면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다”며 즉답을 피하곤 했었다. 그 다음 날인 11일 서울 염창동 한나라당 중앙당사 대표실에서 박근혜 대표를 만났다. 5·31 지방선거 대책 등을 논의한 최고위원회의를 막 마치고 나온 길이었다. 박 대표는 세로 줄무늬가 쳐진 짙은 초록색의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언론에서 ‘전투복’으로 지칭하는 그 차림이다.최근들어 (정확하게는 사학법 투쟁 이후), 옷차림과 말투가 공격적으로 바뀌었다는 분석이 많았던 참이었지만 대권 도전을 선언한 직후라 그런지 더욱 그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과거의 차분한 이미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중요한 쟁점에 대해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와 자세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박 대표는 각종 선거가 있을 때마다 몸살을 앓는다. 전국 각지에서 지원유세 요청이 쇄도하는 바람에 강행군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유권자들과 수없이 손을 마주 잡느라 손바닥이 퉁퉁 부어오르기 일쑤다.“선거운동 기간이 13일인데 광역선거만 16군데서 치러지지 않습니까. 그래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쪼개서 가능한한 최대한 지원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그런 고생을 되풀이할 것 같다.지금은 5·31 지방선거 국면이지만 대권도전을 기정 사실화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 부분부터 바로 물었다.
-다음달 당에서 나오면 바로 대선후보 경선 준비에 들어갑니까. 캠프도 차리고….“(웃으며) 그게 아니고… 대선에 나가려면 규정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거기 맞춰서 대표 임기를 마치고… 그럴 가능성을 저 한테도 열어둔 거죠. 스스로…”
-대권 도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는 상태이겠군요.“구체적인 것은, 전당대회가 7월 초순에 있을 예정이니 전대가 끝나고 적절한 시점에 제 마음을 정리해서 국민들께 전달할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나중에 박 대표의 핵심 측근에게 ‘당장 다음달에 당에서 나오면 국회의원회관으로만 출근할 수도 없고 경선에 대비한 캠프를 차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성격상 사전에 무엇을 준비하고 다음 수순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박 대표 스스로 생각하는 대권주자로서의 경쟁력이나 장점은 무엇입니까.“굳이 경쟁력이라기 보다는…정치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정치인은 개인적인 사심이나 사사로운 이득을 취해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일해 왔습니다. 또 국민과의 약속은 꼭 지킨다는 원칙을 갖고 있고요. 특히 대표를 맡은 후에는 기득권도 다 포기하고 공천 시스템, 인사 시스템을 투명한 공적 시스템으로 다 바꾸고 개혁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정치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원칙을 지킬 각오입니다.”
박 대표는 앞서 지난 9일 열린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다른 대권주자들과의 경쟁력 비교에서 자신이 결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바 있다.당시 ‘다음 대선에서 ‘어머니’나 ‘구원의 여성’(킹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오자 박 대표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한나라당은 당헌·당규에 따른 원칙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 (경선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공정한 선거를 거쳐 나온 사람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그의 승리를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는 것이 원칙이다.”관훈토론회에서는 또 ‘이명박 시장이 만약 기득권을 버리고 박 대표를 후보로 밀 경우 대선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박 대표는 이 시장의 겸양지덕을 바라느냐. 마찬가지로 박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위해 백의종군 할 생각은 있느냐’는 공격적인 질문이 나왔다.
이에 박 대표는 “그게 겸양지덕이 되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경선 룰이 있기 때문에 참여할 사람은 참여하고 당원들과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 이기면 대선에 나가고 지면 승복하는 것 아니냐”고 단호하게 말했다.다시 박대표와에 인터뷰로 돌아간다.
-2007년 대선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정권교체를 해야 할 당위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아직 대선 후보도 아니고, 그런 부분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다음 대선의 의미는 굉장히 큽니다. 역대 야당 가운데 우리 한나라당처럼 무거운 사명을 지닌 야당이 있었겠느냐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은 국민들이 너무 살기 힘들고, 세계화 시대임에도 국제적으로는 우방을 다 잃어 ‘왕따’가 돼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권을 교체해서 바른 노선, 바른 국가이념으로 나라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경제를 발전시켜 선진국으로 가야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면해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봅니까.“지금은 경제를 발전시켜 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 시기입니다. 선진국으로 가는 기회가 우리에게 언제나 있는 게 아니지요. 고령화 속도 등을 고려해 볼 때 향후 10년, 많아야 15년 정도가 기회이겠지요. 이 기간이 아니면 영원히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현 정권식의 정책으로 가면 어렵습니다. 국민들을 편가르기 해서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흩어져선 나라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한나라당은 대선의 의미를 국민통합으로 ‘100% 대한민국’을 만들고, 선진국으로 가는 기틀을 세우는데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5·31 지방선거가 차기 대선의 전초전이 되겠군요. “그렇죠. 물론, 이번 지방선거는 우선 지역발전을 이끌어갈 지역일꾼을 뽑는 선거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 정권의 지난 3년간 실정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선거이기도 하지요. 5년 단임제의 대통령선거는 정권을 심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이번 선거에서 현정권은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나라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정권교체의 시작으로 삼아 올해는 이 정권을 심판하고, 내년에는 반드시 정권을 교체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되찾아 드릴 것입니다.”
-현재 한나라당 지지율이 높은 이유가 한나라당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여권의 잇단 실책 때문에 얻는 반사이익에 의한 것이란 분석이 있습니다만.“물론, 반사이익 같은 것도 있겠지요. 또는 여권의 실정이 너무 많고 국민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는데, 그래서 대통령도 만들어 주고 총선 때도 엄청나게 많은 의석을 줬는데, 살기 어려워지니까 자연히 야당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일 수도 있고요. 집권여당이 국민의 바람을 외면하고 잘못된 일만 계속하면 국민들이 야당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야당이 잘못하면 국민들은 야당도 지지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건전한 정책선거 분위기로 가기 보다는 폭로전·비방전으로 얼룩지는 구태가 재연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가면서 여당은 불리한 선거판세를 뒤집어 보려고 전면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명선거에 앞장서야 할 집권여당이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지요. 우리는 여당의 네거티브 전략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박 대표는 당내에서 불거진 공천비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뒤 차후 유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선거에 임박해서 공천비리가 발각되고, 그래서 재공천 작업이 어렵다면 해당 선거구에는 후보를 안 낼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박 대표는 지방선거 전망을 묻는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문다. 평가를 받는 입장에서 몇 석을 얻겠다고 미리 말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선거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예상은 ‘한나라당의 압승’이다.
특히 지방선거의 최대 승부처가 되는 수도권과 박근혜 대표의 지지기반인 영남권에서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한다.그렇지만 우리나라 선거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권자들의 견제심리가 강하게 작용, 큰 선거에서 한쪽이 이기면 다음 선거에서는 다른 쪽이 이기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결국 지방선거 본격 돌입을 앞두고 대권도전 수순을 밟기 시작한 박 대표에게는 이번 선거가 지난 총선에 이어 자신의 리더십과 대중성을 발휘할 기회가 되지만 경계해야 할 부분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특히 한나라당이란 거대 선단을 이끌다가 혼자 떨어져 나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하는 만큼 ‘대권주자 박근혜’의 진가는 지금부터 진정한 실험대에 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