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 연임하고 싶다”…‘대중적 인기’에 부합할지 주목

2006-06-08     이금미 
불과 석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낙승을 예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앞서 2002년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했을 당시 차기 서울시장 출마설이 회자되곤 했으나, 정치권의 반응은 그의 ‘희망사항’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하지만, 출발 신호를 내뿜고, 발동이 걸린 급행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멈출 의지마저 상실한 듯했다. 4월9일 당내 경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52일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그의 ‘약점’, 본선에서 맞닥뜨린 ‘검증’도 거뜬히 통과. “공약을 실천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겠다”는 그의 완주 일성에서도 의욕이 넘친다. 1,000만 서울시민의 삶과 10조여원의 예산을 책임지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수장.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의 정계복귀 관전평은 이처럼 ‘브레이크는 없었다’로 압축된다. 한편, 서울시장의 또 다른 이름이 ‘소통령’이라는 데서, 그의 ‘정치적 항로’는 이미 결정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바로 차차기 대선 도전이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의 낙승은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다. 열린우리당의 ‘강금실 카드’가 각종 여론조사에 힘입어 차기 서울시장감 ‘1위’에 오르자 한나라당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마’로서 오 당선자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렇다 해도 오 당선자에게 경선 참여 결정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맹형규 전의원과 홍준표 의원은 ‘조직력’에서 앞서 있었고, 상황을 뒤집을 만한 카드가 준비돼 있지 않은 탓이다. 오 당선자의 경선 참여를 바라는 당내 시각이 크게 두 가지로 양분돼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서울시장 ‘당선’을 한 축으로 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흥행 보증’. 한나라당의 높은 지지율을 감안한다면, 오 당선자의 입장에서 ‘본선보다 더 치열한 예선’을 치르는 셈이다.

우려는 ‘본선 경쟁력’이 씻어줬다.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오풍(吳風)은 돌풍으로 변했다. 서울시장 출마 선언 직후 50%를 웃돌 만큼 높은 인기를 실감했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일으키는 강풍(康風)도 집어 삼켰다. 경선 통과와 동시에 급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오 당선자의 지지율은 본선이 치러지기 훨씬 전부터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위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오 당선자의 위기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시작됐다. ‘콘텐츠가 부족하다’, ‘당비 미납’ 논란 등은 당내 경선을 앞두고 불거졌다. 본선전에선 광고 출연에 대한 선거법 위반 논란과 함께 선거 막판까지 말실수로 인한 구설수에도 올랐다. 물론, 오 당선자는 각종 장애물을 거뜬히 재꼈다.

‘클린 이미지’ 최대 무기

그렇다면 오풍의 동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중적 친밀감에 더한 ‘클린 이미지’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오 당선자는 91년 경기 부평 산곡동 K아파트 일조권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뉴스 메이커로 부상했다. ‘스타 변호사’로서의 자리매김은 TV를 통해서다. 94년 ‘오변호사 배변호사’를 시작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 ‘시사토론 오늘과 내일’ 등에서 진행을 맡았다. 대중적 인기는 지난 16대 총선을 거쳐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후 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과 당 개혁운동을 주도했다.

정치자금 모금 규제를 대폭 강화한 일명 ‘오세훈 선거법’도 만들었고, 17대 총선을 앞두고선 당내 5·6공 인사의 퇴진을 주장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게다가 서울시장 경선 참여 결정 직후 그의 ‘깜짝 고백’은 그의 이미지를 한층 업그레이드 하는 데 공헌했다. 구김살 없는 말끔한 외모와는 달리 서울 변두리 빈촌을 전전했다는 소시적 추억이 그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소통령’이 됐다. 집행하는 예산의 규모와 인사권에 비춰 서울시장은 대권 주자들의 ‘길목’으로 통하는 자리다. 이는 당선이 결정된 순간부터 그의 많지 않은 나이가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자치 도입 11년 만에 첫 40대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올해 45세인 오 당선자 앞에 놓인 정치적 항로가 분명해졌다는 얘기다. 바로 차차기 대선 도전이다.

시장 업무 능력은 지켜봐야 할 듯

선거운동 기간중 오 당선자는 대권 출마 의사를 묻는 질문에 “기회가 된다면 시장을 연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정가에서 나도는 차차기 대권주자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오 당선자가 지나온 발자취가 한나라당의 전통적 색깔에서 비켜나 있다는 것 역시 차차기 대선 국면에서 빛을 발할 경쟁력으로 꼽힌다. 좀더 왼쪽에 가까우면서도, 또래 운동권 출신 정치인에 견줘 부드럽다는 평이다. 오 당선자 선거캠프에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윤여준 전의원은 그를 가리켜 “한국 정치의 내용과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방향타’”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우려가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심에는 오풍의 실체에 대한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장 출마에 대한 미련을 접은 오 당선자를 다시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가장 큰 무기는 그의 ‘대중적 인기’였다. 또한, 정치인이기에 앞서 CF에 출연하고 TV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스타 변호사였다. 대중성은 기성 정치인과 다른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이미지는 오풍을 재생산했다.

그리고 경선 출마 선언과 동시에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오 당선자에게 ‘행운’이 따랐다는 것이다. 정책·공약 이행으로 ‘오세훈’만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오 당선자의 정책은 ‘청계천’과 ‘뉴타운’으로 압축된다. 세부적으로 ▶세운상가 현대화 및 문화공간 조성 ▶임대주택 10만호 건설 ▶남대문·동대문 시장 등 도심 상권 부활 ▶서울 대기질 개선 등이다. 일단 임기 종료를 앞둔 이명박 서울시장의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데서 ‘정책 일관성’이라는 합격점을 받은 상태다. 그러나 개척자인 이 시장과 바통을 이어받은 오 당선자에 대한 ‘성과’ 혹은 ‘평가’가 같을 수는 없다. 이 역시 오 당선자에겐 부담이다.

# 낙마한 강금실 ‘실보다 득’ 대중 정치인으로 ‘우뚝’…역할론 ‘급부상’

일찌감치 ‘패배’가 예견돼 있었음에도 강금실 전법무부 장관의 낯 빛엔 아쉬움이 묻어나지 않는다. 물론, 서울시민에 대한 섭섭함도 내비치치 않는다. 그렇다고 득표율에서 위안을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의 득표율은 최근 당 지지율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 강 전장관은 큰 표 차이로 낙선했다. 법무부 장관 시절, 이후 ‘강효리’로 불리며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당시의 지지율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당 안팎에선 ‘정치인 강금실’로의 변신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2의 도전’을 예견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이유는 뭘까.

넘어지지 않는 ‘오뚜기’

강 전장관을 옆에선 지켜본 이들의 예측은 보다 앞서 있다. 선거 기간 내내 강 전장관의 ‘입’ 역할을 해왔던 오영식 대변인은 “강 후보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민병두 의원은 “대중 정치인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는 얘기다. 정치 입문 56일 만에 고배를 마셨음에도 말이다. 이같은 평가가 나오는 데는 열린우리당의 지지율과 강 전장관의 개인적 지지율이 괴리가 크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우리당의 낮은 지지율이 강 전장관의 서울시장 선거 레이스에 발목을 잡았다. 50%를 웃돌던 강 전장관의 지지율은 우리당 입당을 계기로, 또 오풍을 만나면서 기가 꺾였다.굳이 따지자면 강 전장관이 선거 기간에 내뱉은 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그는 선거 이후 자신의 ‘진로’에 대해 “(서울시장이)되든 안 되는 우리당을 중심으로 새롭고 진실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시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고 했다.

불면투혼 발휘 ‘강한 인상’

강 전장관 입장에서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는 지난 4월5일 정동극장에서 ‘서울구상’을 발표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결정했다. 당이 어렵다는데 내 입장만 앞세울 수 없었다”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여당과 대중, 그리고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이라는 무언의 ‘압력’에 의해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는 인상을 남긴 게 사실이다. 때문에 이같은 강 전장관의 ‘의지’가 정치권에 전달되자, 예사롭지 않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박근혜 피습 사건’을 만나면서 재역전의 기회를 놓친 이후 의지가 강해졌다는 데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는 5월28일 0시 명동성당 마리아상 앞에 섰다. 촛불기도를 위해서였다.

이후 30일 자정까지 72시간을 달렸다. 승부가 기운 뒤에도 굴하지 않는 강 전장관의 투혼에, 지방선거 직후를 내나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정치권의 해석이 줄을 이었다. 향후 전개될 정치권 격변기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관측. 지방선거 직후, 일각에선 차기 대권 도전에 참여할 시기 결정만 남은 게 아니냐는 섣부른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강 전장관 스스로 ‘패배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 전장관은 쪽방 유세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을 앞세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나, 현장에 와서 사람들이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선거 마지막날 ‘서울시민 호소문’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났고 분노하고 울었다. 여러분의 꿈이 깨지지 않는다면 강금실도 부서지지 않겠다. 강금실도 꺾이지 않고 끝까지 같이하겠다”고 했다.

당내 여론도 ‘절반의 성공’

어쨌든 ‘불면(不眠)의 마라톤 유세’에 나서면서 선거기간 내내 포인트를 잡지 못해 고전했던 그 말, ‘강금실다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승패와 무관하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기존 정치인과 다른 강 전장관만의 모습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당 지지율을 넘어 강금실의 힘으로 얻은 나머지 5%의 득표율에, ‘절반의 성공’이라는 내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선거에서는 비록 졌지만,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력은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선거운동 초반, 강 전장관은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미숙함, ‘현실 정치판’에서의 한계, ‘정체성’의 불투명 등을 보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또 개인 강금실과 우리당이라는 조직의 접목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이번 선거는 정치인 강금실에게 ‘실’보다 ‘득’이 많았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강 전장관은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우리당은 강 전장관을 위한 ‘적절한 자리’를 검토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