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켜진 도청 X파일 “호재냐 악재냐” 무게 저울질
2005-08-17 홍성철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이 터진 후 정치권에서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고난도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 도청 사건에 대한 본질적 부분보다는 ‘음모론’ ‘청와대 인지론’ 등을 제기하며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야권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승규 국정원장이 사전 교감 내지는 조율설을 들고 나왔고, 여권에서는 이 사건을 연정-개헌과 맞물린 정국대반전을 위한 카드로 활용할 태세다.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7일 “노 대통령이 도청 파일을 파악한 후 은폐하고 있다가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해 공개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며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도 9일 “국정원은 이미 지난 2월에 X파일 존재사실을 청와대에 보고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청와대 인지설을 제기했다.
DJ버리기는 읍참마속
DJ와 동교동측도 음모론에 가세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등 적잖은 정치적 시련에도 함구로 일관했던 DJ도 이번 만큼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일 DJ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한 것은 인내력에 한계를 느낀 이른바 ‘화병’도 한몫 했을 것이란 관측이다.동교동측의 강한 반발과 예상치 못한 DJ의 입원에 청와대와 여권은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노 대통령은 11일 DJ가 입원중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김우식 비서실장을 보내 쾌유 기원과 함께 도청사건과 관련한 시중의 음모설은 사실 무근임을 전달했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도 지도부 릴레이 병문안 등 ‘DJ 달래기’에 주력하고 있다. DJ와 도청은 무관하고 오히려 DJ는 도청의 최대 피해자임을 부각시킨다는 방침이다. 가뜩이나 호남민심과 일부 지지층이 여권에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DJ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자칫 자중지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하지만 일부 정치권 인사들은 노 대통령과 여권 관계자들의 DJ 달래기는 도청 파일 이면에 숨겨져 있는 비수를 꺼내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호남민심과 일부 지지층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DJ에게 최대한의 성의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일 뿐 도청 카드와 관련한 손익계산은 이미 끝났을 것이란 분석. 오히려 여권 핵심부의 ‘DJ 버리기’는 도청 마스터플랜의 시작을 알리는 ‘읍참마속’에 불과할 것이란 게 이들 인사들의 시각이다. 과거 안기부(현 국정원) 미림팀의 불법 도청 사건인 ‘안기부 X파일’을 기폭제로 한 일련의 도청 후폭풍이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이른바 ‘사전기획설’을 제기하고 있는 것.
이와관련, 정가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살아있는 권력과 정보기관의 관계를 고려할 때 김승규 국정원장의 고해성사는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와의 사전 조율속에 이뤄졌을 것”이라며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갖고 있는 노 대통령도 정치적 실익을 계산한 후 도청 카드를 꺼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또 “김승규 원장이 국정원장직을 제의 받고 수차에 걸쳐 고사를 한 배경에는 국정원 개혁과 과거사 청산 등 자신이 떠 안아야 할 무거운 짐을 예단했기 때문”이라며 “결국 이러한 부담을 떠안으면서 김 원장이 정보기관 수장자리를 수락한 이면에는 노 대통령과의 또다른 밀약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 벼랑끝 승부수
실제로 김 원장은 지난 5일 “DJ정부 시절 4년 동안에도 도·감청이 이뤄졌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김 원장의 고해성사는 도청 사건의 칼날을 한순간에 YS정권에서 DJ정권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됐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국정원의 발표 시점이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도청 사건에 대해 정면돌파 의지를 천명(3일)한 직후라는 사실도 석연치 않다. 노 대통령과 김 원장이 사전 조율 내지는 교감속에 도청 카드를 꺼내들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다.이에 대해 청와대와 여권은 사전기획설은 물론 음모론과 사전인지설에 대해서도 전혀 사실무근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DJ 버리기’와 관련해서는 호남민심 이반과 여권내 자중지란 등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떠 안으면서까지 무리수를 두겠냐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하지만 노 대통령이 처한 어려운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사전기획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 일각의 시각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정국반전 승부수로 띄웠던 ‘연정론’카드가 아무런 성과없이 야권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등 체면을 구기고 있다. 지난 4·30 재보선 참패로 국회 과반의석 확보가 좌절됐고, 북핵 등을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여기에 부동산정책 실패 등으로 빈익부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서 서민들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집권초 낼걸었던 각종 개혁정책도 이렇다할 성과를 못보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가 아닐 수 없다. 여권 내부에서도 오죽하면 권력을 나눠주겠다며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겠냐는 푸념이 나돌 정도다.이런 상황에서 도청 카드는 위기를 돌파하는 동시에 정국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다. 도청 사건은 무엇보다 구호만 무성했을 뿐 지금껏 과실을 따지 못한 각종 개혁정책을 밀어붙일 명분을 주고 있다. 과거 잘못된 관행으로 권력에 종속됐던 국정원을 전면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YS·DJ정권이 자행한 불법 도감청을 빌미로 과거사 청산작업도 탄력을 받게 됐다.
정치적 부메랑을 예단하면서도 ‘DJ 버리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실 보다 득이 많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여기에 도청사건은 과거 정권은 물론 한나라당도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여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꽃놀이 패나 다름없다. 코너에 몰린 노 대통령과 여권이 언제든 정국반전용 내지는 야권 압박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카드인 셈이다. 나아가 도청카드는 차기 대권구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YS와 DJ정권에서 정치권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도감청이 이뤄진 사실에 비춰볼 때 여야를 망라한 차기 대권주자들 또한 도감청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가 여야 잠룡들의 치부가 담긴 파일을 확보했을 경우 여권내 차기구도는 물론 향후 대권정국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 웃는 정대철 통곡하는 서청원… 희비교차
2002년 대선 당시 여야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정대철·서청원 전의원의 엇갈린 운명이 화제다. 12일 발표된 8·15 대사면 명단에 정 전의원은 포함된 반면 서 전의원은 제외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권 내부에서도 ‘사면불가’ 논란이 끊이질 않았던 정 전대표를 사면 대상에 포함한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다. 정 전대표는 굿모닝시티 윤창열 전 대표로부터 4억원을 받은 혐의로 2004년 1월10일 구속됐다. 하지만 정 전대표는 올 2월17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의 확정선고를 받고 5월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실제 복역기간은 약 1년4개월에 불과한 셈이다. 형기의 3분의 1도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풀려나게 돼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에 반해 서 전의원은 추징금 12억원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번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특히 서 전의원측은 사면복권을 위해서는 형 확정이 필요하다는 정부측의 주문에 따라 항소까지 포기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서 전의원측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추징금을 다 내지 않고도 사면복권됐다며 이번 정부의 처사는 서 의원을 두번 죽이는 꼴이라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두 사람의 엇갈린 사면 운명을 지켜본 정치권 관계자들도 ‘유권무죄 무권유죄’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