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

2008-02-04      기자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이씨 조선왕조 개국 초에 뒷날 3대 태종 왕이 된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쩌면 개국 일등공신 이었던 ‘삼봉 정도전’의 ‘신권주의’가 뿌리를 내려 잘하면 일본 같은 상징적 군주 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방원의 첫째 목표는 왕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척신세력이 날뛰던 고려 말기와 아주 다른 모습의 강력한 왕권 국가를 염원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에서 열까지 행정부처 곳곳의 문제를 자신의 힘 아래 확고하게 둬서 그 어떤 권력 누수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강력 채택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를 죽였고, 처남들을 도륙한 이방원의 왕권주의 덕택에 ‘세종’ 같은 명군이 태어났다는 평가가 사실적이다. 아들 세종의 운신 폭을 넓히기 위해 자신의 측근 공신들은 물론 아들의 처가까지 도륙 낸 정도였다. 이렇게 왕권 강화의 핵심은 ‘거치적거리는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이미 ‘신권주의 정도전’이라는 최대의 적수와 목숨 내놓은 전쟁을 벌여 간신히 승리한 반면 교사적 교훈을 안고 있은 터다.

쉽게 말해 토끼 사냥을 끝낸 사냥개의 기를 살려 놓으면 자칫 주인에게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철학에 젖었던 것 같다. 이는 세종 사후 병약한 문종에 이어 단종 대에 이르는 동안 왕권이 여지없이 무너졌던 맥락과 연계해 생각해볼만하다. ‘황표정사’라고 하여 인사 지명권을 위임받은 신하들이 황색 점을 찍어 대상자를 표시하는 방식까지 시행했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 쿠데타의 주요 명분이었다.

의정부서사제의 요체는 모든 국사를 의정부 3정승의 의결을 거쳐 시행하는 것이다. 이때 왕권은 거의 맥을 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의정부서사제냐, 6조직계제냐 하는 통치행태를 누가 정해 놓지 않는다. 그야 말로 치우친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 됐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내각 책임제와 대통령 중심제를 헌법으로 갈라놓지만 말이다.

우리는 4.19 직후의 민주당 과도기를 빼고 60년간 대통령중심제를 하고 있다. 다 같은 대통령제에서도 통치행태는 큰 차이가 났다.

내각이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낸 제왕적 대통령이 있었는가 하면 측근이 날뛰게 한 가신(家臣)정치도 횡행한적 있다. 때문에 앞으로 이명박 정부는 어떤 통치행태를 보일 것인가 하는 점이 국민적 큰 관심사가 돼있다. 특히 차기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되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주위에 표정관리가 필요 하거나, 목소리를 조절하고, 눈치를 살펴야 될 정도로 빚진 곳이 없다.

빚져서 움츠릴 일이 없다는 것은 어디에나 당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행히 공천 작업이 무난히 끝나서 4월 총선에 한나라당 과반의석만 만들어지면 이명박 정치는 탄탄대로의 ‘거침없는 권력’이 될 것이다. ‘신권’이 감히 대립할 수 없는 ‘왕권’에다가 국회권력까지 장악되면 이를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민은 이 제왕적 권력이 나라 경제를 일으키는 동력으로만 작용되기를 빌고 바랄 것이다. 이 부분이 또한 4월 총선에서의 한나라당 압승을 점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