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고별사를 다시 떠올린 이유

2006-09-10      
매년 8월의 폭염이 지나고 아침 저녁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9월이 오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류작전 모습이 떠 오른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낙동강까지 점령해 내려가있던 북한 공산군의 허리를 잘라 괴멸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천 상륙은 북한 점령군과 남로당 완장을 찬 빨갱이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있었던 ‘반동 학살’을 중간에서 차단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대한민국을 적화로 부터 구해준 수호자이고 은인임이 틀림없다. 그런 은인을 근년 반미친북 분자들이 ‘분단의 원흉’ ‘생명을 앗아간 원수’ ‘학살자’ 라고 공공연히 외쳐댄다. 심지어 그들은 맥아더의 동상마저 끌어내리고자 작년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8월에는 미국의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이 내한해 무더위속에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찾아 헌화해 가슴을 뭉클케 했다. 하이드 위원장은 82세의 노구를 휠체어에 의지해 가면서도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예방한 것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이 반미친북 언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한국은 누가 적인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항의한 바 있다. 그는 “북한을 변명해주는 사람은 미국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힐난했었는가 하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면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이드는 맥아더 동상 앞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맥아더의 1951년 4월19일 미 의회 고별사를 떠올렸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55년 전 고별사에서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모든 것을 건 유일한 국가”이고, “한국인들의 용기와 기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밖에도 그는 맥아더가 “한국인들은 (공산주의)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기를 선택했다”고 지적했음도 환기시켜 주었다. 맥아더가 반공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않은 한국인들을 미더워하며 존경하고 있었음을 전해준 대목이었다.
맥아더의 고별사는 하이드가 소개해준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맥아더는 고별사를 통해 얼마나 아시아를 중시하고 있었는가도 피력했다. 그 때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치우쳐 아시아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런 미국인들에게 맥아더는 아시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아시아가 통속적으로 유럽으로 가는 출입구 정도로 여겨지지만, 유럽 또한 아시아로 가는 출입구에 해당된다며, 두 지역은 서로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상관관계에 놓여있다”고 역설하였다. 미국은 유럽만 중시할게 아니라 아시아 또한 유럽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안된다는 충고였다. 그 후 그의 예단대로 아시아는 미국의 주요 무대로 부상하였다.
맥아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별사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비위맞추기 유화책이 자해 행위임을 경고했다. 그는 “유화책은 오직 새롭고도 보다 참혹한 전쟁을 불러 올 뿐임을 인류 역사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고 환기시켰다. 그는 유화책은 “허구의 평화만을 가져왔다”며, “보다 새롭고 더 큰 요구를 강요케 함으로써 끝내 폭력 충돌로 치닫게 한다”고 경고했다. 적에 대한 유화책은 결국 ‘참혹한 전쟁’을 가져 올 뿐이라는 교훈이었다.
1951년 맥아더의 의회 고별사는 오늘날 노정권에 의한 친북 유화책의 무모함을 예고한것 같아 더욱 새롭다. 대북 유화책이 ‘허구의 평화’만 가져왔을 뿐이고 북으로 하여금 ‘보다 새롭고 더 큰 요구을 강요’케 하여 끝내 ‘참혹한 전쟁’으로 치닫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는데서 그렇다. 맥아더 장군의 55년 전 고별사를 되새겨 보면서 노정권의 반미친북 유화책은 즉각 중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