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핵심의 보이지 않는 실세, 대통령의 그림자

2005-04-19     유제성<언론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김우식 비서실장과 함께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회의실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대통령과의 ‘접근성’ 이유로 막강 실력자로 군림비서형·실무형·정치형 유형 ‘과유불급’ 반면교사청와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징크스’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이 청와대에 없을 때는 꼭 큰 사건·사고가 터진다”는 것이다.대통령의 휴가 때, 또는 외국순방 때 반드시 어떤 큰 일이 벌어진다는 징크스인데,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과 터키를 방문하고 돌아온 이번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노 대통령의 부재 중에 철도청(현 철도공사) 러시아 유전개발 투자 의혹 사건이 증폭됐고, 더구나 여기에는 노 대통령 핵심 측근인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연루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언론들이 보도한 정체불명의 청와대 ‘외교안보위원회’가 등장하기도 했다.앞서 역대 대통령들도 꼭 청와대를 비우고 외유를 떠나거나, 휴가를 갔을 때 ‘대형사고’가 터져 조기에 복귀하는 등 소동을 피운 적이 많다. 출범한 지 2년이 갓 넘은 참여정부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출범 첫 해인 2003년 8월2일부터 지방으로 여름휴가를 갔다. 그런데 이틀 후인 4일에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자살소식이 날아들었고, 당시 터진 양길승 전 제1부속실장 향응사건도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그해 10월 ‘아세안+3’ 정상회의 참석 도중에 터져나온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 사건은 ‘대통령 부재 징크스’의 결정판이었다.

또 지난 해 5월 노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청와대 당직실이 대통령 전화를 받지 않은 사건으로, 6월 방일 때는 현충일과 겹치는 바람에 야당에서 ‘등신외교’ 발언이 나오는 등 어수선했다. 대통령의 부재 중에 터져나오는 이런 징크스들을 감당하는 사람은 청와대 비서실장(공식 명칭은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해외순방에 나설 때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외유 일정을 엇갈리도록 조정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대통령 비서실장도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면 청와대를 지킨다.최고 통수권자 보좌하는 최고보직대통령 비서실장도 ‘비서’다. 문민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씨가 국회에 불려나갔을 때 당시 조홍규 의원이 본회의장에서 ‘김 비서, 김 비서’하고 불렀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실제론 대통령 비서실장의 파워는 막강하다.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의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의 산하에 있는 공무원은 498명이다. 여기에는 ‘7수석·4보좌관·49비서관’이 포함돼 있다.이런 양적인 측면 외에도 대통령 비서실장은 언제나 최고 통수권자와 만날 수 있다는 ‘접근성’ 때문에 권력 안에서는 최고의 보직으로 친다. 얼마 전 김우식 현 대통령 비서실장의 아들 결혼식과 관련해 축의금을 가로채려던 일당이 검거된 것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힘을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김우식, 술자리서 ‘대형사고’

노무현 대통령 부재 중에 청와대를 지켰던 김우식 실장은 최근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홍석현 주미대사의 발탁 사실을 처음 언론에 알리면서 이름이 뜨기도 한 인물이다.그는 보수적 논조의 ‘조선일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선일보와의 화해를 주선한 일화로 유명하지만, 그에 걸맞게 노 대통령의 깊숙한 심정을 잘 아는 사람이다.그런 그가 ‘홍석현 주미대사 내정’이란 ‘대형사고’를 친 것은 술자리였다. 김 실장은 지난 해 12월16일 청와대의 모든 수석·보좌관들을 대동하고 청와대 인근 효자동의 음식점 ‘토속촌’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2004년 송년 만찬을 하던 중이었다. 이곳은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지기인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의 초등학교 동창인 J씨가 운영하는 유명한 삼계탕·갈비집이다.망년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거나하게 취한 김 실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기자 여러분께 정보를 하나 주겠다”고 운을 뗀 뒤 “주미대사에 깜짝 놀랄 만한 빅카드가 기용돼 곧 발표된다”고 말했다. 당연히 기자들은 자리를 파하고 ‘깜짝 놀랄 빅카드’가 누군지에 대한 취재에 들어갔고, 결국은 밤 11시쯤 대통령 비서실 등으로부터 ‘빅카드=홍석현’이란 코멘트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대통령 비서실장의 국정 인지력, 참여력을 확인하는 대목인데, 그는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 당시 본인이 부총리 인선에 직접 간여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굳이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정보력과 파워를 간접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다. 미국 정부에 아그레망도 보내기 전에 밝힌 ‘과시용 정보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만큼 고급정보를 접하고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가 대통령 비서실장이다.다음과 같은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의 면면을 보면 그들이 어떤 위치에서 얼마 만큼의 권력을 휘둘렀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3공시절 이후락 실세군림

이 명단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이후락·김정렴·김계원,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함병춘·김윤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노재봉,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박관용,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김중권·박지원, 현 노무현 대통령의 문희상 실장일 것이다.이후락 실장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마치고 1972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당시 ‘독약’을 품에 안고 평양으로 잠행해 ‘7·4 남북 공동성명’ 문안에 합의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김일성은 그를 ‘영웅’으로 추켜세웠다고 한다. 김정렴 실장은 얼마 전 김우식 실장이 자택을 방문해 대통령 비서 업무 책임자로서의 ‘노하우’를 자문해 언론을 탔다.김계원 실장은 10·26 현장에 있으면서 유신정권의 종말을 지켜 본 인물이다.

전두환 시절 김윤환 ‘킹 메이커’명성

전두환 대통령 때 비서실장을 지낸 함병춘씨는 1956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던 ‘인텔리’였다. 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1980년대를 움직일 세계의 100명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적이 있었을 정도로 촉망받는 행정가였지만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에 공식수행원으로 갔다가 ‘아웅산 묘소 참사’로 순국했다.전두환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김윤환씨는 이후 노태우-김영삼 정권을 창출하는데 일조하면서 ‘킹 메이커’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그 역시 지금은 고인이다.노태우 대통령 때의 노재봉씨는 이후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지금은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할 때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김영삼 대통령의 ‘상도동’ 인맥이었던 박관용씨는 이후 국회의장으로 있으면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현장에 서 있기도 했다.김대중 대통령 때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박지원씨는 DJ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싸운 라이벌이었다. 당시에도 DJ는 지금의 김우식 실장처럼 ‘실용주의’ 비서실장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때 발탁된 인물이 민정당 출신 김중권씨였다. 당연히 ‘DJ의 분신’을 자처하는 박지원씨의 견제가 따랐다. 당시 김중권 실장은 구여권 출신답게 ‘정보력’으로, 박지원 실장은 ‘정치자금’으로 승부를 걸었다.

결과는 DJ의 “국민의 정부가 잘 되도록 서로 협력하라”는 한 마디에 묻혀 무승부로 끝났지만 당시 청와대 안에서는 이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어느 비서관은 ‘동교동’ 출신임에도 김중권 실장에게 매료돼 각종 정보를 직보하는 바람에 동교동 가신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지금 박지원씨는 형집행정지로 풀려 났지만 행보가 제약돼 있고, 김중권씨도 지난해 총선에서 실패한 뒤 대만 유학 중이다.참여정부 첫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문희상씨는 ‘외모는 장비, 머리는 유비’라는 평가에 걸맞게 매우 정치적이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당의장 경선 과정에서 그 어려운 난관을 뚫은 데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원이 작용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문희상 대표적인 ‘정치형’실장 평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통령학’을 연구하고 있는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비서형(개인적인 영향력은 적고 대통령과의 신임관계도 약함)= 김계원·함병춘·강경식·한승수·전윤철▲실무형(개인적 영향력은 강하지만 대통령과의 관계는 별로)= 정해창·박관용·김광일▲정치형(개인적 영향력은 매우 약하면서 대통령과의 신임관계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 김윤환·한광옥. 실제로 청와대 취재를 하면서 역대 비서실장들을 지켜 본 필자는 함 교수의 분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너무 비서형으로만 흘러서도 안되고, 정치형 성격을 띠어도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실무만 챙기라는 얘기도 아니다.대통령이 권력에 취해 너무 앞서 나갈 때 이를 견제하고 올곧은 소리를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이 나와야 할 것이다.조선시대의 국왕 비서실장은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조정의 중추적인 정치기구였던 ‘승정원’의 책임자 ‘승지’였다.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 등 모든 문서가 승정원을 거치도록 돼 있어, 그 힘이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승지로서 후대에 이름을 날리고 신망을 얻는 인물은 전해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