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총성 없는 사명 변경 전쟁

“피보다 진한 건 돈과 명예다”

2010-08-31     이범희 기자
브랜드의 가치가 기업의 가치이다. 코카콜라, 마이크로 소프트 등은 그 브랜드 가치만으로도 천문학적이다. 삼성, 현대 등 국내 대기업들도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브랜드를 개발해 키우는 비용보다 외국의 유명 브랜드를 가져오는 것이 적게 든다는 판단에서 브랜드 수입도 러시를 이루고 있다. 이는 국내 소비자가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며, 소비욕구가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때문에 마케팅 관계자들은 ‘기업=브랜드’라는 인식을 통해 신선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기업 인지도와 브랜드의 이미지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창업 1세대에서 2~3세대로 넘어오면서 ‘사명(社名)’ 때문에 법정 문제로까지 비화되는 일이 빈번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계열이 분리되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브랜드 인지도를 쟁취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이는 기업 이름이 브랜드가치를 정하고, 사업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에 [일요서울]은 분쟁을 겪고 있는 재벌가(家) 기업들의 다툼을 알아본다.

국내 재벌가의 ‘사명’전쟁의 역사는 짧다. 100년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두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6·25전쟁 이후 설립된 회사다. 그동안 재계의 혈육전쟁사는 상속·유산 다툼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지적재산권인 회사이름을 둘러 싼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기업 브랜드 가치가 ‘사명(社名)’에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회사 이름에 대한 브랜드 가치가 커지면서 사명(社名)을 둘러 싼 형제·친족 간의 혈투도 치열한 양상을 띈다. ‘사명’ 전쟁에 대표적인 기업이 대성, 롯데, 현대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성그룹 형제, ‘대성’사명싸움

대성그룹은 두 차례에 걸쳐 유산·상속을 둘러싼 ‘형제의 난’을 펼쳤다. 형제간 정통성을 주장하며 ‘사명’과 ‘회장 명칭’을 둘러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00년 10월, 김수근 당시 대성그룹 회장은 경영권 이양을 위해 영대, 영민, 영훈, 세 아들들을 회장실로 불러들였다. 장남 영대에겐 모기업인 대성산업을, 차남 영민에겐 서울도시가스, 삼남 영훈에겐 대구도시가스를 넘겼다. 그러면서 삼형제의 우애를 고려해 형이나 동생이 맡은 기업에는 나머지 형제를 이사로 등재되도록 조치했다.

계열분리를 끝내고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김 명예회장이 사망했다. 이때부터 ‘황금분할’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장남인 김영대 회장의 대성산업이 보유한 서울도시가스 지분(62.94%)과 대구도시가스 지분(26.3%)의 정리가 문제가 됐다.

김영대 회장 측은 “경영권 프리미엄과 자산 가치를 감안해 시가 이상의 가격에 팔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영민, 영훈 두 동생은 “즉시 주식을 시가에 팔고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포기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때 장남 대 차남·삼남으로 편이 갈리며 주식 매수전과 주총 표 대결에 이어 법정분쟁으로까지 비화됐다. 3개월가량 지속된 이 분쟁은 결국 원로들의 적극적인 중재를 통해 두 동생들의 주장대로 정리됐다. 그러나 형제간의 골은 깊어졌다. 이후 김영대 회장과 김영훈 회장 측은 ‘대성그룹 회장’ 호칭 문제를 둘러싼 ‘정통성’ 싸움이 벌어졌다.

김영대 회장은 장자이면서 모기업인 대성산업을 물러 받아 ‘대성그룹 회장’명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김영훈 회장도 “그룹을 분할, 경영한다는 합의만 있었지 누가 ‘대성그룹 회장’ 명칭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면서 ‘대성그룹 회장’을 사용했다. 명칭 신경전은 김영대 회장이 그룹을 떼고 ‘대성회장’으로 사용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이듬해 대성그룹 형제간의 사명(社名)을 건 신경전은 법정 다툼으로 번졌다.

대성산업 김영대 회장은 지난 5월 25일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대성산업의 인적분할을 결정하고, 영업회사명을 대성산업(재상장)으로, 지주사명을 대성지주(변경상장)로 정했다.

그러자 김영훈 회장이 즉각 반발, 고소를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대성홀딩스는 “대성산업이 주식회사 대성지주란 이름으로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상장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대성산업이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지주사명을 대성지주로 정해, 지주사를 의미하는 대성홀딩스의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롯데家 사명전쟁사

롯데그룹도 사명전쟁에서 편치 않다.

그 시발점은 ‘롯데라면’이 출시되면서다. 지난 65년 설립된 농심(신춘호 회장)의 전신 롯데공업에서 라면을 생산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형(신격호 회장)의 뜻을 어기고 자기 잇속을 챙기려 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롯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75년 롯데공업은 ‘농심’이라는 브랜드 제품을 출시한다. ‘형님 먼저 동생 먼저’라는 광고가 크게 히트하면서 성공을 거두자 78년 아예 회사이름을 ‘농심’으로 바꾸었다. 70년대 초중반까지는 ‘롯데라면’을 통해 ‘롯데’라는 이름을 쓴 셈.

그러나 사명과 사업문제로 형제간 골이 깊어진 두 형제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롯데는 로고문제로 가족관의 분쟁을 벌인 적도 있다. 롯데그룹은 2007년 6월 여행업에 진출하면서 신격호 회장의 매제인 김기병 회장이 경영하는 롯데관광개발과 갈등을 빚었다. 롯데그룹측이 ‘L’자 3개가 겹친 롯데심벌마크를 쓰지 말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양측은 소송을 거치면서 롯데관광이 사명은 유지하되 L자를 3개 쓰는 롯데 로고는 쓰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어 롯데는 일본JTB을 통해 여행업에 뛰어들었다.


현대家도 사명분쟁

현대기아차 그룹도 신흥증권을 인수하면서 사명을 ‘현대차IB증권’으로 정했다가 법정분쟁을 겪었다.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증권이 제동을 걸었다. 현대증권 측이 서울중앙지법에 ‘HYUNDAI IB증권’이란 상호 사용을 금지토록 하는 가처분 신청(부정경쟁행위 중지 등 가처분 신청)을 한 것.

당시 현대증권 관계자는 “같은 업종 내에서 동일 상호를 쓰는 것은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이에 따라 신흥증권 주총에 앞서 법적인 대응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신흥증권 HMC증권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증권업계의 진출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사명 분쟁의 원인은 창업주에서 2~3세로 경영권이 승계되면서 골 깊은 가족 간에 갈등에서 비롯됐다. 최근 ‘사명분쟁’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창업정신’이 사라진 창업2~3세들이 신사업 추진, 기업분할, 지주사 전환 등을 하는 과정에서 ‘정통성’과 ‘기업브랜드’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 같은 분쟁은 결국 기업 브랜드 이미지 하락으로 이어져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잃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