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家 아픈 역사… ‘비운의 황태자’ 만들었나?

충격-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대표 ‘자살’

2010-08-24     박주리 기자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 이재찬(46)씨가 지난 8월 18일 오전 자신의 주거지인 서울 용산구 이촌동 D아파트 1층 현관에 떨어져 투신자살했다. 이 씨는 고 이병철 회장의 차남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의 차남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의 자살 소식으로 범 삼성家는 슬퍼했다. 지난 2005년 삼성가 3세인 이윤형씨가 자살한 데 이은 두 번째 자살 소식이기 때문이다. 비운의 삼성가 3세 이재찬 씨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

삼성가 3세 이재찬 새한미디어 전 대표가 지난 18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용산경찰서는 당일 오전 7시 20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D아파트 1층 출입구 앞에 숨져 있는 이 씨를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이 씨를 발견한 경비원 신모 씨(61)는 “현관 입구 쪽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흰색 면티를 입은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경비원 등의 진술로 미뤄 이 씨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 중이다. 사고 직전 이 씨는 이 아파트 5층 집에서 혼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씨는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의 차남으로 고 이병철 상성그룹 창업주의 손자다. 그의 죽음에 삼성가는 한마디로 슬픔에 잠겼다. 몇년전 삼성가 3세인 이윤형 씨에 이은 두 번째 자살 소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죽음에 얽힌 비화에 대해 세인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무슨 이유로 죽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삼성가에서 분가해 나온 새한의 역사를 반추해보면 알수 있다.


범 삼성가에서 몰락한 유일한 기업

새한그룹은 고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 회장이 설립한 회사다.

이 회장은 1966년 삼성그룹 소유의 한국비료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으로 연루돼 수감 생활을 했다. 부친의 삼성 경영 복귀에 반기를 들어 삼성에서 배제된 후 새한그룹을 설립했다.

새한은 한때 재계 서열 20위권에 들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이창희 회장은 1991년 58세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이생을 마감했다.

이창희 회장의 부인인 이영자씨가 회장, 장남인 이재관 씨가 부회장을 맡아 공격적인 경영으로 대대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계열사를 12개까지 늘렸다. 당시 재계 27위였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를 무시하고 확장한 사업에 1995년 7000억 원이었던 부채가 1조 7000억 원대로 급증했다.

다변화하던 미디어 시장을 흐름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해 주력이었던 비디오테이프산업이 콤팩트디스크산업으로 전환되면서 경영위기를 맞게 됐다. 경영 손실 규모도 점점 불어났다.

지난 2000년 채권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 압박에 시달리게 돼 결국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계열사가 모두 매각·청산됐다.


그룹 오너에서 월세살이로

새한의 운명은 결국 가족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재관 부회장은 2003년 분식회계를 통해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실형을 받았다.

또 새한미디어의 사장을 지낸 이재찬 사장은 워크아웃이후 엔터테인먼트 관련 사업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2000년 이후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한류’열풍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기업군으로 발돋음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부 엔터테인먼트회사들은 코스닥 업체들에 인수되어 주가조작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만큼 빚 좋은 개살구 였다는 것이다.

사업경험이 부족한 이 씨에게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다변화되는 미디어산업을 쫓아가기엔 무리였다는 게 연예산업 관계자들에 전언이다.

이 씨는 사업실패 이후 재기를 꿈꿔 왔지만 번번히 실패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았고 우울증을 앓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한 이 씨의 아파트를 수색 하던 경찰은 유서는 발견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약을 발견했다. 경찰은 그가 수년 째 우울증에 시달려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씨는 1964년 생으로 경복고를 1983년 졸업했다.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대 경영학을 졸업 후 새한미디어 부사장을 거쳐 1997년 사장 및 생활서비스부문장을 역임했다.

이 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 선희씨와 결혼을 해 슬하에 아들 둘을 뒀으나 5년 전부터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이 씨는 혼자 아파트(109㎡, 34평형)에 월세 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 달에 월세로 150만 원을 지급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가, 왜 그의 부고 꺼리나

이재찬 씨의 발인식이 지난 20일 오전 11시 30분 삼성의료원에서 거행됐다. 상주는 고인의 장남이 맡았다.

이날 발인식에는 형 재관씨, 동생 재원씨, 미망인 최선희 씨와 두 자녀 등 유가족을 비롯해 배호원 삼성정밀화학 사장과 유석렬 삼성토탈 사장과 고인의 지인 30여 명이 참석해 조촐하게 치러졌다.

애초 별거중인 부인과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조문객을 맞을 상주조차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빈소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또한 유가족들은 부고를 내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극도로 외부노출에 민감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었다. 하지만 세간 사람들의 질타에 발인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사촌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정용진 신계계 부회장, 이부진 에버랜드 전무 등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발인을 마친 고인의 시신은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화장됐다. 고인의 유골은 경기도 안성시에 소재한 새사람 선교회 안성수련원에 마련된 수목장에 안장됐다.

당초 아버지 고 이창희 회장이 안장돼 있는 충북 충주시 가금면 구 새한미디어농장을 고려했지만 유족들간의 이견이 있어 수목장으로 변경됐다.

사고 당일 이 씨의 사체는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져 사건조사를 마쳤고, 같은 날 오후 7시 50분께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 영안실에 안치됐다.

익명을 요구한 이 씨의 한 측근은 “사업 실패이후 부인과 별거하고 혼자서 살았다. 자존심이 강해 누구에게 지원을 요청하거나 손을 벌리지 않고 힘들게 살았다. 사촌간인 삼성과는 원수지간처럼 지냈던 것으로 기억난다. 재벌에서 한 순간에게 나락으로 떨어진 그가 세상에 나와 겪기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


#재벌家의 자살…왜?재벌총수가 선택한 자살

총수가 된 재벌2세의 자살은 세간을 놀라게 한다.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과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자살로 세간에 충격을 줬다. 그들은 형제들과의 불화와 함께 경영압박, 비리자금 혐의 등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형제의 난’으로 숙청당한 박용오

지난해 11월 초 박용오 상지건설 회장은 “회사 부채가 너무 많아 경영이 어렵다”는 유서를 남긴 뒤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 회장은 지난 2005년 ‘두산 형제의 난’으로 두산그룹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었다.

그는 당시 동생인 박용성 회장과 그룹의 경영권 문제로 충돌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두산그룹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폭로 되면서 결국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2008년 시공능력 50위의 성지건설을 인수해 재기를 꿈꿨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건설경기가 침체되면서 경영실적이 좋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남 박중원씨가 횡령 혐의로 구속되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회장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두산그룹 회장을 지냈다.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1998년 한국야구위원해 총재를 역임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형제의 난’으로 가족에서 배제된 충격과 자괴감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세웠다.

결국 2009년 11월 4일, 집안에서 넥타이에 목을 매 자살을 함으로써 향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03년 8월 4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종로구 계동 사옥에서 의문을 남긴 채 투신자살했다.

‘왕자의 난’의 황태자에서 외톨이로 2002년 9월 5억 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 조사에 이어 추진하던 대북사업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제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재계 인사들은 “부친의 숙원 사업이었던 대북 사업 등 가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동기”로 추측했다.

2000년 ‘왕자의 난’을 통해 현대그룹은 현대그룹(현대아산, 현대건설 등 26개의 계열사),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나눠졌다. 현대그룹은 5남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차남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그리고 현대중공업은 6남 정몽준 회장이 차지했다.

범 현대가의 자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 4월에는 정신질환을 앓던 왕회장의 4남 정몽우씨가 서울 강남 모 호텔에서 음독자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