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2 | 100억 장자 성공비법 공개 - ㈜빅라인스포츠 유부근 대표
“현장 누빈것이 성공비결”
2010-05-17 기자
흔히 일선 경영 현장을 ‘전쟁터’라고 말한다. 오늘날 재계에서는 그만큼 치열하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재계 경영자 대부분이 남성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재벌가에서 ‘여성’이란 늘 내조의 역할을 맡아왔다. 흔히 재벌가에서 ‘올바른 자녀교육’, ‘뒷바라지’ 등을 미덕으로 삼는 것도 전통적인 여성관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 같은 여성관이 변하고 있다. 여성들은 뒤질세라 적극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야구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프로야구의 공인구는 ㈜빅라인스포츠(대표 유부근)가 만들고 있다. 유 대표는 “한 우물만 판 신념과 현장을 누빈 것이 성공의 키워드가 됐다”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사실 유 대표는 고교시절 스포츠와는 별개의 삶을 살았다. 여느 여고생과 같이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다. 활달한 성격 탓에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고교 졸업 후 취업과 대학진학 등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그녀에게 큰 오빠가 제안을 하나 한다.
“서울에 올라와 오빠 일을 도와줘라.” 그녀의 오빠는 당시 동대문야구장에서 야구용품, 유니폼 등을 제조 판매하는 체육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는 프로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기에 일손이 모자랐다. 진로 때문에 고민하던 그녀에게 오빠가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면서 달콤한 유혹을 한다. “3년 뒤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 갈 수 있도록 밀어줄게. 서울에는 좋은 남자들이 많아”라는 것.
충남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오빠의 농담 같은 말만 믿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3년 이라는 오빠의 약속은 30년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오빠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유 대표는 “3년 뒤 시집보내주겠다는 말만 믿었다. 몇 차례 선도 봤다. 하지만 3년이 지난 후에도 똑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오히려 점점 일에 빠져드는 시간이 늘어났다. 스포츠 시즌이 돌아오면 정신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또 한 번 오빠의 호출이 떨어졌다. 오빠가 더욱 충격적인 제안으로 유 대표를 끌어안았다. “(오빠는) 앞으로 체육사는 네가 맡아서 해라. 이제 너에게 다 맡겨도 될 것 같다”며 체육사를 물려준 뒤 다른 사업장을 차렸다.
또 한 번 오빠의 폭탄발언에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오빠 밑에서 사업을 배우던 동생이 그 사업체의 대표가 된 것이다. 비록 오빠의 최측근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일을 했다지만, 사업이라는 영역에서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유대표는 “현장을 누비며 인맥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사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뚝심을 발휘한 것도 이 시기였다. 무조건 현장에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회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노력했다. 유니폼·배트·헬멧 등 야구용품을 제조 판매하면서 사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야구공이 없다보니 입찰에 들어갈 때마다 경쟁업체에 밀렸다. 이것이 최대의 문제라는 생각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2003년 부도가 난 야구공 제조업체를 인수했다.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인재도 스카우트했다. 사명도 빅라인스포츠로 바꿨다.
더욱 바빠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업은 번창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인재들을 동원하다보니 숱한 난관에 빠지기도 했다. 한때는 모 외국상표업체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유 대표는 모든 난관을 이겨냈다. 이에 ‘빅라인스포츠’의 야구공은 KBO의 공인구로 현재 SK와이번스와 히어로즈에서 사용하고 있다. 야구공 수만 35만개. 80여개의 초중고와 계약을 맺어 야구공을 비롯해 글로브, 배트, 유니폼 등 용품을 납품하고 있다.
한 우물만을 고집했던 그녀의 성격이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엔 100억 원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축구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붉은 악마’ 티셔츠 제작으로 큰돈을 벌었다. 수십억 원대이던 연매출이 100억 원대로 늘어났다.
“당시는 매일같이 밤샘 작업을 하면서 일을 했다. 창고에서 쥐가 갉아 먹은 원단도 손질해서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유 대표는 “당시는 축구공을 만들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축구 관련 업체 대부분이 이러한 수익을 거두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유 대표의 측근들은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스포츠현장을 누빈 그녀만의 성격이 성공비결을 이뤘다고 귀띔한다.
또한 유 대표는 2007년부터 한국여자야구연맹 부회장직을 맡아 여자야구 활성화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향후 목표 또한 야구발전을 위한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얻은 수익금을 모아 야구장 지을 부지를 마련하는데 사용할 뜻을 내비친다.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야구와 관련된 일을 오랫동안 하다보니까 야구랑 결혼해 사는 것 같아요. 야구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인맥이 쌓여 이젠 야구인이나 다름 없어요. 그래도 시집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큰 오빠의 ‘배신’은 용서할 수 없어요.”
[이범희 기자] skycros@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