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기업가의 자식농사 제4탄 - 한화 김종희 편

“부딪쳐라,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2009-12-15     정리=이범희 기자

재계에서 손꼽히는 대다수 기업들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신뢰를 자랑한다. 그리고 그 경영자들에게는 오랫동안 역동의 시대를 거쳐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녀를 강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부를 일구는 것보다 부를 다스리는 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조직을 관리하는 법을 학습시킨다. 그렇다면 ‘재계의 고수’인 창업주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어떤 교육법을 선사할까. 지난해 출간된 <명문 기업가의 자식농사><밀리언하우스>는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자녀교육법을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들의 자식 농사법을 알아본다. 이번호는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의 자식 농사법이다.

고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생전 별명은 ‘다이너마이트 김’이다. 다이너마이트 등의 화학사업에 주력하면서 맺은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관계자들 간의 돈독한 인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며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런 별칭이 따라붙었다.

그는 자식을 가르칠때도 다이너마이트의 특성처럼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의 방식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기보다는 향후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야 할지 본인 스스로 느끼게 하는 체험식 교육에 치중했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자녀들이 엄청난 파괴력으로 대변되는 뚝심과 추진력을 배우기 바란 것은 물론이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특히 장남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차남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에게는 평소 특유의 ‘대장부론’을 강조했다. 그는 생전에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담배도 피워보며 단맛 쓴 맛 다봐야 한다”며 “어차피 무엇을 하든지간에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호연지기를 키울 것을 권했다.

장남인 김승연 회장을 당시로는단어조차도 생소했던 조기유학을 보낸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찍이 해외 견문도 넓히고 혼자서 자립심도 키우라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가 경영학을 전공한 후 이어서 정치학을 전공한 것도 보다 많은 식견을 쌓아서 훗날 아버지 못지않은 기업인이 되어야 한다는 각오 때문이었다. 김승연 회장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때부터 꿈이 사장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청소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그룹 내 공장 중 안 돌아본 곳이 없을 정도로 일찌감치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장남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역시 한때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통했다. 아버지의 스타일을 쏙 빼닮은 점이 크게 작용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비즈니스를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뚝심과 추진력으로 성공시킨 것이 한두 건이 아니다.

김승연 회장이 한국화약그룹을 승계 받은 것은 고작 29세 때였다. 그동안 아버지를 보좌해 경영수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대기업의 사령탑을 맡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흔히 수성이 창업보다 힘들다고 한다. 창업은 남보다 특출한 용기와 결단력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수성은 창업의 기틀을 다져 나갈만한 지혜와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

당시 그룹 내 중역들까지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눈치였다. 미국에서 10여 년간 공부만 하고 돌아온 젊은 회장이 아직 국내 실정에도 익숙지 못한터에 과연 그룹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까 모두 회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한화 그룹 총수에 오른 김 회장은 특유의 업무 추진력으로 카르스마 강한 총수로 변신에 성공했다. 대한생명 인수, 유화와 화약을 중심으로 한 제조부문, 대한생명과 한화증권을 중심으로 한 금융부문, 유통과 레저 위주의 신성장 등 3대 축을 완성했다. 그릅을 물려받았을 때와 비교하여 그룹의 규모는 20배 이상 성장했다. 80년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통과 레서산업으로 과감히 발을 뻗친 것도 김 회장의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녀의 꿈과 희망에 눈높이를 맞춰라

‘장부론’에 이어 김종희 창업주의 두 번째 자녀교육 원칙은 재테크 하듯이 자녀 재테크를 하라는 것이다. 단순히 사교육비를 지출하자가 아니다. 남들 다 가는 학원에 보내고 남들 다 보는 교재를 사주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자녀교육을 과감히 버리자였다.

제대로 된 교육은 자녀의 재능을 파악해 그것을 최대한 살릴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한다는 식은 절대로 바람직한 교육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 자녀가 잘하는 것, 관심이 많은 것이 무엇인지 대화를 통해 타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녀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전력투구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격려하는 것이 자녀 재테크의 기본 원리다.

김승연 회장이 미국 시카고 바울종합대학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김 회장의 아버지는 가끔 로스앤젤레스 지사에 출장을 나오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시카고에 있는 김 회장을 로스앤젤레스로 불러내 호텔방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가 대화의 핵심이었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 애기도 들려주며 부자간의 눈높이를 조율하는데 힘썼다.

이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돈에 관한 아버지의 철학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을 버는 것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돈을 버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자신이 고생하며 돈을 벌었던 일화도 털어놓았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를 하러 다닐 때도 점심밥을 못 싸가지고 다녔고, 그래서 늘 물로 배를 채우곤했지만 나뭇짐만큼은 남보다 크게 해서 지고 날랐다는 고생담이었다. 또 당시 나무를 하러 다니다가 낫에 베인 탓에 왼손 새끼손가락이 똑바로 펴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부자간의 정을 중요시 여기는 전통은 김승연 회장의 자녀교육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자식 잘 되기 바라는 부모의 심정이야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겠지만 김 회장은 특히 자식들이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

“눈에 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고, 그곳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평소 김 회장의 소신이기 때문이다.

김승연 회장은 세 아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안한다. 다양한 경험과 문화·체육활동을 오히려 권한다. 선친이 대장부론을 강조했듯이 김 회장 역시 자녀들이 이것저것 다양한 문화를 체험해 호연지기를 기르길 원한다.

부모가 공부하라고 닥달하지 않는데도, 김 회장의 세 아들 모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 미국 명문 고등학교를 나와 명문 대학에 입학, 수업을 받고있다. 장남 동관은 미국 하버드 대학을 다녔고, 차남 동원은 예일대학, 막내 동선은 미국에서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밀리언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