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24탄 - 일신방직 김영호 회장 편

“내가 남편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누가 희생하겠는가?”

2009-11-10     정리=이범희 기자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중이다. 다음은 일신방직 김영호 회장의 어머니 우관실 여사 이야기다.

일신방직 김영호 회장의 어머니 우관실 여사는 1910년 8월 11일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부친 우진 모공과 어머니 김진신 여사 사이에 위로 두 오빠를 둔 2남 2녀 중 장녀였다. 우 여사는 태어날 때부터의 모태 신앙으로 일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부친 우진모 공은 1898년 강서군 송호리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장로이자, 보신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도 경지가 높아 인근에서 글씨를 부탁해 받아갈 정도였다. 당시 관서지방의 선교를 맡은 마포살열이나 이길함, 북장로교 선교회의 소안론이 송호리를 찾아오면 우진모 공의 사랑에서 여장을 풀곤 했다. 시골이었지만 우 장로의 집은 규모도 크고 깨끗하였다.

용강군 태생의 어머니 김진신 여사 또한 기품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김 여사의 할아버지 생일날에는 왕가에서 각종 포를 비롯한 마른 반찬 세 고리짝을 보내왔고, 주변 지역의 수령들이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였다.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하고 3년이 지난 스물하나 꽃다운 나이의 우관실 규수는 스물여섯 살의 총각 김형남과 결혼하였다. 신부의 오라버니들이 숭실학교 출신이고, 신랑의 큰 누님이 우 규수 할머니 남동생의 며느리였으므로 두 집안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신랑은 어렸을 때부터 우 규수네 집에 자주 놀러 다녔고, 또 친 오누이처럼 다정한 사이기도 했다.

김형남은 이 무렵 미국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터라 신랑감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평양의 명망 있는 집안 여러 곳에서 청혼이 빗발쳤다. 그러나 인연의 끈은 우 규수와 연결되었다. 특히 김형남 총각의 큰 누님이 평소 가까이서 지켜보던 우 규수를 욕심내 혼사를 서두르게 되었다. 1930년 4월에 약혼을 하고, 5개월이 지난 9월에 혼례식을 치렀다. 신혼살림은 신랑의 사업체인 대동피혁 공장 사택에 차렸다.

그런데 신혼 첫날 신랑의 첫마디가 이랬단다. “관실이가 내 색시가 될 줄은 몰랐어” 그만큼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다.

1933년 남편이 경영하던 피혁공장이 문을 닫았다. 투자자들이 금광에 투자해서 더욱 많은 이익을 남기겠다며 투자한 돈을 회수해갔기 때문이다. 1934년 남편이 목포로 내려가 부친이 운영하던 서점에 3·1서원 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우 여사는 처음엔 진남포 친정에 머무르다 이듬해에 목포로 내려갔다. 목포 서점의 좁은 살림집은 장티푸스로 돌아가신 시숙 김형모 공의 식구와 시부모까지 함께 기거했으므로 몹시 협소하였다. 방들도 앞이 깊고 뒤가 낮아 활동하기에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방이 컴컴해서 천장에 구멍을 뚫고 유리를 끼워 넣어서야 그나마 빛이라고 구경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남편은 2년 동안 고생 끝에 비로소 점포를 옮길 수 있었다. 우 여사의 고생도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식구들 뒤치닥거리는 일이 끝이 없었다.

한편, 서우로 피해 온지 10일 만에 김형남은 강서군 출신인 오정수, 김성호 등의 추천을 받아 미 군정청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오정수의 추천으로 광주의 ‘종연방직 전남 공장 관리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방직회사가 기반을 잡아갈 무렵 한국전쟁이 반발했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웠지만, 특히 우 여사의 고생은 막심하였다.

전쟁이 한창인데도 공장이 걱정되어 노심초사하던 김형남은 서울로 올라갔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장은 폭격으로 모든 시설이 형체를 찾기 어렵게 파괴되어 있었다. 체격이 건장했던 김형남은 죽을 먹으면서도 악착같이 현장 복구에만 매달렸다. 피로에 지친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김형남은 안방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루에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우 여사와 아이들은 아직 부산에 남아 있었고, 사택엔 공장의 기술자들 그리고 밥일 하는 아주머니뿐이었다.


신앙적 믿음으로 이웃 사랑 실천

우관실 여사는 교회의 사업에 언제나 적극적인 협조자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교인 숫자가 늘어나자 새문안교회는 성전신축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66년 건축위원회가 조직되어 성전 신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때 우관실 권사도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산하에 여전도장학회가 있는데 모든 회원들이 사재를 모아 순수한 마음으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그룹이다. 이 여전도회 첫 모임이 1797년 4월, 우관실 여사의 집에서 열렸다. 초대 이사가 11명이었는데, 우관실 여사도 그 중 한 분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우 여사는 딸이든 아내든 지도자든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이것이 보람된 인생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보람된 삶의 형성을 위해서는 첫째 나라가 현재 처한 위치에 대해 알아야 하고, 둘째 자신을 바로 알고 소질을 개발해야 하며, 셋째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중에서도 하나님 믿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겨 “성공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을 간직했다.

우 여사는 평생을 신앙생활에 충실하며 감사기도,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잊지 않았다. 신앙인의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속의 다짐도 언제나 잊지 않았다.

이처럼 우 여사는 깊은 신앙심을 지닌 크리스천이었다. 우 여사가 이런 신앙심을 가진 데에는 장로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성경을 많이 읽고, 예수의 공적을 소상히 알며, 진실한 경배 드리기에 힘쓰는 아버지를 통해서 깊이 있는 신앙인이 된 것이다. 남편을 대함에도 ‘내가 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다른 누가 내 남편을 위해 희생할 것인가’하는 마음으로 잠언 12장의 말씀을 실천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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