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22탄 - 삼환그룹 최종환 명예회장 편

삼환그룹 초석의 등불을 키우다

2009-10-27     정리=이범희 기자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중이다. 다음은 삼환그룹 최종환 명예회장의 어머니 김림자 여사 이야기다.

최종환 삼환그룹 명예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한마디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은 우리 어머님입니다”

최 회장의 어머니는 김림자 여사이다. 김림자 여사의 아버지는 대궐 안에서 일하던 관인이었는데, 슬하에 딸만 여섯을 두었는지라 6공주 집이라고 불렸다. 김림자 여사는 이 6공주 집의 셋째였다.

김 여사는 경주 최씨 집안 최지원 공의 23대 손인 최상림 공과 혼인하였다. 당시 첫째부인과 사별한 최상림 공의 재취 자리로 들어온 것이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최종환 회장은 그 중 다섯째이다. 1984년 94세 일기로 김 여사는 별세했지만 최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항상 내 마음속에서 살아계시며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다”

김 여사는 우리네 어머니 모두가 그러했듯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대했다. 그러나 김 여사가 마흔 다섯 되던 해에 남편 최공이 세상을 떠났다. 최종환 회장이 열 살 되던 해 보통학교 2학년 때였다.

이때부터 김 여사는 7남매를 키우느라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먹여 키울 일만으로도 난감한데 빚쟁이들까지 몰려들었다. 김 여사는 우선 다급한 빚을 갚느라 집부터 팔아야 했다. 그리고 종로 5가의 허름한 빈민촌 오두막집에 새로운 거처를 정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된 생활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아들의 기억 속에서 당시 어머니는 그저 밤낮없이 몰두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낮에는 품을 팔기 위해 남정네들의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고,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이슥토록 바느질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고달프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일에 열중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정갈하고 숙연하기만 했다. 어려운 형편에 명절이라고 새 옷을 사 입힐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내의 한 벌 없이도 추운 겨울을 잘도 견뎌주었다. 먹는 것 또한 풍족할 리 없으니 자식들 먼저 먹이고 언제나 맨 나중에 수저를 들어야 했다. 무엇 하나 변변하게 먹여볼 처지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김 여사는 자식들에게 새 옷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해지거나 더러운 옷은 절대로 입히지 않았다. 구멍 난 양말은 반드시 기워서 신겼다. 이토록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어머니는 기품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자식들이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어머니는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주곤 했다.


집안 버팀목 역할 ‘톡톡’

최종환은 나이 열일곱인 1941년 3월에 첫 월급을 받았다. 쌀 한가마니에 8원 50전 정도 하던 그 때, 17원이 조금 넘었으니 제법 큰돈이었다. 월급봉투를 손에 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동대문 쌀가게로 향했다. 그 시절은 대부분 뒷박으로 쌀을 사먹던 때였다. 아들 종환은 일제에 의해 징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징병을 떠나던 날, 서울역 플랫폼에서 어머니는 아들 종환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의 눈물은 아들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는 강한 의지의 씨앗이 되었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뒤뜰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아들의 무사생환을 빌었다.

아들이 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던 날도 어머니의 정성스런 기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도 어머니 김림자 여사는 목욕재계하고 기도에 열중했다. 그 때 아들 종환이 앞마당으로 들어서며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정말 아들이 왔나싶어 황급하게 장독대를 내려오다 넘어지기까지 했다. 종환이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머니는 아들의 사업이 잘 되기만을 간절하게 바랐고, 아들은 사업이 커나가는 것을 어머니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늘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먼저 알려드렸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목욕재계하고 정성으로 사업의 행운과 발전을 기원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늘 무사 안전을 빌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는 “정직해라. 성실해라. 남한테 손가락질당하면 안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 공사 현장마다 나가 기공식 고사를 지내주었다. 떡사루 하나까지 당신 손으로 직접 지은 것은 물론이다. 자식들이 장성해 생활의 여유가 생겼다.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즐거운 여행, 고생고생해서 길러준 어머니께 자식들은 편안하고 즐거운 여생을 보내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호강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예전처럼 소박한 밥상에 옷 두어 벌로 만족해했다. 자식들이 드린 용돈도 당신을 위해서는 잘 쓰지 않았다. 그걸 모아 두었다가 주변을 돕는 일에 사용하곤 했다.

최 회장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훈으로 삼아 늘 마음에 새기며 자식들에게도 가르쳐왔다. 최 회장에게는 가훈도 기업 정신도 모두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훈인 것이다.

“우리 어머님은 나의 종교입니다”

이렇게 말한 정도로 어머니를 존경했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드리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이자 보람으로 알고 살아왔다. 최 회장의 집무실 앞에는 어머니의 작은 동상이 모셔져 있다. 그것을 보며 한시라도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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