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 14탄- 유일한 창업주 편

넓은 마음 지닌 ‘김기복’유한의 기틀을 마련하다

2009-09-01     정리=이범희 기자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유한양행 창업회장 유일한의 어머니 김기복 여사의 이야기다.

유한양행 창업회장 유일한(柳一韓)의 어머니 김기복(金基福) 여사의 원래 이름은 김확실(金確實)이다. 김확실 처자는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20여 리 떨어진 강계라는 마을에서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조혼 풍습이 있던 시절이라 김확실 처자의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벌써 결혼을 걱정해야 했다.

유기연 총각이 스물일곱, 김확실 처자가 열다섯 살 되던 188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슬하에 1893년 첫째딸 선한, 1895년 첫아들 일한(아명은 일형)을 낳은 것을 비롯해 6남 3녀를 얻었다.

이듬해,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에서 파견한 닥터 홀(William James Hall)이라는 캐나다 의사가 평양에 들어왔다. 의료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닥터 홀의 인격과 봉사 정신에 감명받은 유기연 공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이름도 김확실에서 김기복으로 바꾸어 호적에 올렸다. ‘기복’이란 이름은 아내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복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아들 유일한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거친 손이 늘 염색물에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자랐다. 일한이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최초로 한 제품 광고가 미국산 염료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기연 공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직접 겪었다. 전쟁을 직접 겪으며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기 전에 장남이라도 빨리 미국으로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904년 봄, 아들 유일한은 제물포에서 가족들과 작별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과감한 결단력, 집안 내력 살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김기복 여사의 가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신여고를 다니던 큰딸 선한이 독립 운동가들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다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게 됐다. 남편 유기연 공은 북간도에서 민족 운동가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돕고, 독립 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그러나 장사가 이전처럼 잘되는 것도 아니라 갈수록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외국 유학중이던 유일한의 도움을 받은 유기연 공은 그 돈으로 북간도에서 땅을 샀다. 그리고 소작농들을 거느리고 땅을 일궈 콩이며 수수, 메밀, 옥수수 등을 심었다.

김 여사는 여기에서 수확한 메밀을 맷돌에 갈아 고운 가루를 내고 그 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뽑아냈다. 그리고 이 국수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장이 서는 날에는 일이 바빠졌고, 온 식구가 메밀국수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장사는 꽤 잘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예 식당을 개업하게 되었다.

1922년, 아들 유일한은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다.

큰딸 선한은 북경에서 유학하던 중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가족들과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다. 그러다가 막내 순한이 열 살 남짓 될 무렵에야 아이 셋을 데리고 북간도 친정집을 찾았다. 막내는 집에다 두고 왔다고 했다. 며칠 뒤 북경으로 돌아간 선한은 10여 년이 지난 후,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삼한은 중국무관학교 출신으로 장교가 되었지만 이내 아편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돈이 필요해 집을 찾아오면 아버지는 아들을 야단쳐 집 밖으로 내쫓아버리곤 했다. 그러면 마음이 약해진 김 여사가 밤중에 몰래 삼한에게 푼푼히 모아둔 돈을 쥐어주곤 했다. 결국 삼한은 아편 중독자를 위한 농장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고, 필요한 비용은 큰형 유일한이 부담해주었다.

칠한(성한)은 일찍이 폐결핵 진단을 받고 해주 결핵 병동에 들어가려 했으나 방이 없어 거절당했다. 훗날 큰형 일한이 병원에 별채를 지어 기증하기로 하고서야 해주에서 입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김 여사는 먼저 보낸 큰딸과 둘째아들을 당신의 가슴속에 묻고 살았다. 평양에서 살던 1934년 8월에는 남편 유기연 공마저 당신 곁을 떠났다. 김 여사는 밀려오는 슬픔에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막내딸 순한의 신랑감으로 큰아들 유일한이 유한양행 사원 홍용선을 점찍자 김 여사는 사윗감이 마음에는 드는데 어쩐지 약해 보인다며 신체검사를 받아보도록 했다. 말하자면 건강 진단을 받고서 혼사를 결정하도록 한 셈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김 여사의 생각이 꽤나 합리적이고 현대화된 셈이다.

양가 어른을 모시고 막내딸 순한의 약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은 열 달 후에 올리기로 했다. 그 열 달 동안 둘의 만남은 주로 주말마다 경성에 있는 큰오빠 유일한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큰아들 집에 머무르는 어머니가 감시(?)하기 쉽도록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1937년 크리스마스 무렵, 막내는 서대문 자택에서 신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막내까지 혼사를 마치자 김 여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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