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연재-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 8탄 - 조석래 편
희생과 인정으로 자식사랑 ‘싹’틔웠다
2009-07-21 정리=이범희 기자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조석래 효성 회장의 어머니 하정옥 여사의 이야기다.
하정옥(河貞玉) 여사는 1905년 진주 호족 성균생원 하세진(河世鎭) 공의 차녀로 태어났다. 열일곱 나던 해에 열여섯 살의 조홍제(趙洪濟: 호는 만우, 효성그룹 창업회장, 1906∼1984) 총각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만우는 처가로 향하던 재행길에서 그만 마마에 걸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 달 동안 병석에 눕게 된 신랑은 약 시중에서 미음 시중까지 장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이때의 일로 만우는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장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자연스레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나야 할 신부는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신랑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집안사람들 보기 부끄러워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이것으로 신방에서 뜬눈으로 새우게 한 미안함을 갚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엄한 가풍 탓에 신랑의 얼굴도 보지 못한 신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하물며 신랑의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드러내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은 속으로만 신혼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봄이 되자 신부는 시댁으로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혼의 아기자기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시할머니는 건넌방에서, 시어머니는 안방에서, 새댁은 뜰아래 방에서 지내는 한 지붕 3대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신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기거하는 사랑채 끝 방에서 기거했다. 그러니 신혼생활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랑 만우는 의복을 갈아입을 때도 하인을 통해야 했다. 어쩌다 먼발치로 신부의 모습을 보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이렇듯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나날이 몇 년이나 이어졌으니 애틋한 신혼의 정을 속으로 만 쌓을 수밖에 없었다.
희생과 내조로 가족 화목 ‘도모’
하 여사는 평생 남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하 여사만큼 남편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갓 시집온 며느리까지도 ‘우리 시아버지는 우리 시어머니를 굉장히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만우 회장은 하정옥 여사를 아꼈다.
하 여사는 두 딸을 만우 회장이 고향인 함안의 군북농협 조합장을 지내고 있을 때 출가시켰다. 큰딸 명숙(明淑)은 스물한 살 나던 해인 1943년 진양의 대지주 허복 공의 차남 정호 총각과 혼인하였다. 결혼 당시, 정호 씨는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둘째딸 명률(明律)은 산청의 대지주인 권동혁 공의 맏아들 병규 총각과 혼인하였다. 후에, 맏사위는 병원장, 둘째 사위는 효성건설 회장을 지냈다.
아들 셋은 서울에서 혼사를 치렀는데, 맏아들 조석래 회장은 재무장관, 수출입은행장 등을 역임한 송인상 회장의 사위가 되었다. 둘째아들 조양래 회장은 법조계의 원로인 홍긍식 고문의 둘째사위가 되었다. 둘째는 형님보다 앞서 혼례를 치렀다. 셋째 조욱래 회장은 농림장관을 지낸 김종대 회장의 사위가 되었다. 셋째 며느리는 대학 2년생이었는데, 당시 경기여고 손영경 교장이 중매를 섰다.
소위 명문가와 사돈 관계를 맺은 셈이다. 자식들의 결혼을 통해 자연스레 만우 회장의 가계는 재계 혼맥의 중심이 되었다.
만우 회장은 건강이 악화되자 사돈들에게 경영에 참여해 아들들을 돕도록 부탁하였다. 송인상 회장에게는 사위인 조석래 회장을, 홍용희 고문에게는 처남인 조양래 회장을, 김종대 회장에게는 사위인 조욱래 회장의 경영을 도와주도록 부탁한 것이다.
하 여사의 아들 3형제는 이렇게 처가 쪽 식구가 경영에 참여하는 공통점 외에, 3형제가 모두 경기고 동문이기도 하다.
남편 만우 회장이 삼성과의 동업 관계를 접고 효성그룹의 기틀을 다진 것은 56세 때의 일이다. 또한 만우 회장이 신학문과 접촉할 기회를 얻은 것은 결혼 이후였다. 열아홉에 중학교에 입학해서 30세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늦게 시작했어도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후원해준 동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 여사의 희생과 내조가 없었다면 만우의 성취나 성공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만우 회장의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어린 손자(조현준 효성무역 PG 사장)의 눈에도 할아버지의 이런 사랑이 느껴졌다.
할머니가 말없이 수저를 내려놓거나, 돌아앉거나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할아버지는 신경을 썼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면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손자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화가 나도 큰 소리로 야단치지 않는 조용하고 섬세한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인 하 여사는 1978년 6월, 74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이들 곁을 떠났다.
하 여사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만우 회장에게 죽음도 영생이라는 큰 깨우침을 주고 떠났다.
유가의 전통 속에서 자랐고 서구의 학문을 익힌 남편 만우를 불제자로까지 인도하지는 못했지만, 하 여사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래서일까 만우 회장은 “업보의 영구성을 믿게 된 것은, 늘 윤회의 철리를 깊이 믿는 아내에게서 받은 감화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상청 돌보는 일을 병중인 만우 회장이 꼬박 1년 동안 직접 행한 것만 보아도, 하 여사의 일생은 깊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활짝 피어난 삶이었음이 틀림없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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