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퇴임 안전판 만든다”
2006-11-15 이금미
여당내 친노 인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지지층에 전달하고 있다. ‘통합신당 반대’라는 수동적 저자세도 버렸다. 구체적인 정치일정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지난 4일 김대중 전대통령을 직접 찾아간 직후부터다. 그전까지 잰걸음이었다면, 이들의 보폭은 눈에 띄게 커졌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결코 요란하지 않다. 물밑에서 전달하고 나중에 알리는 방식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사는 안희정씨다. 최근 들어 부쩍 여의도 나들이가 잦다. 여당의 재선 및 초선의원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잇달아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 ‘메신저’
안씨가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잡아 두 개다. 노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에 대한 강력한 의지, 그리고 정계개편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궁극엔 노 대통령이 주도하는 향후 정계개편, 또는 전당대회를 위한 역할 분담으로 알려진다. 전당대회에서 당의장을 선출하고, 새 당의장 체제로 외부 인사들을 영입해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로 대선 후보를 뽑는다는 구상이다.
또 대통령의 퇴임 이후 구상과 관련, 중책이 맡겨졌을 것이라는 관측도 높다. 친노세력 재정비가 그것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당 사수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얼마 전엔 ▲도로 민주당 반대 ▲탈당 불가 ▲전당대회 결과 승복이라는 정계개편 3원칙을 제시한 터다.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안씨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노사모 재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당 내 안씨의 지인들은 손사래를 친다. 이렇다 할 직책도 없고, 일상적인 만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인들의 얘기가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 없다. 안희정, 그가 누구인가.
안씨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다. 또 386 출신 참모 중 최측근이다. 때문에 그를 가리켜 대통령의 좌(左) 희정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참여정부 출범 직후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야인(野人)의 길을 걷고 있다. 비록, 지난 8월15일 사면·복권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정치적 낭인(浪人)일 뿐이다. 다른 386 참모들이 청와대에 안착한 이후, 17대 총선에 나서 줄줄이 금배지를 챙겼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불법 대선자금 수수로 인해 옥고도 치렀다. 유력설이 돌았던 청와대 정무특보단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노무현의 ‘장자방’
정치인 노무현과 불행은 같이할 수 있어도, 행복만큼은 같이 할 수 없었던 참모가 바로 안씨다. 때문에 정치권에선 안씨를 장자방에 비유하곤 한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나 지혜로써 실마리를 풀어 주고, 위기에 처할 때마나 살아날 방도를 마련해 주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했던 참모 장자방. 장자방은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신선처럼 살고 싶다”면서 빈손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노 대통령의 퇴임 이후 구상과 관련 안씨의 역할이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권발(發) 정계개편론이 무르익어가고 있지만, 차기 대선을 꿈꾸는 범여권 주자들에게 노 대통령은 걸림돌일 뿐이다. 대놓고 노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는가 하면, 당 지도부까지 나서 “이래라, 저래라” 대통령의 역할에까지 주문을 하고 있다. 정계개편의 또 다른 축인 민주당과 고건 전총리 진영에서도 노 대통령은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다.
17대 대선 1년 2개월, 18대 총선 1년6개월이 남아 있는 시점, 핵심 참모 안씨가 노 대통령의 위기를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소설에서나 통할 일이다.
사면·복권 직전부터 안씨는 오랜 칩거를 청산하고 기지개를 켜 왔다. 지난 7월 초 우리당 친노 의원들의 모임인 의정연구센터 소속 의원들과 독일과 프랑스 등을 방문, 선진국의 당원제도와 대선경선 방안 등을 관찰하고 돌아왔다.
이후 여권 386 인사들과 향후 정계개편 방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 왔고, 이들이 중심이 돼 오픈프라이머리 제도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게다가 노 대통령의 ‘외부 선장론’도 이 시기에 등장한 터다.
정치적 ‘백수’
최근엔 여의도 정가 주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안씨가 국회 앞 한 건물에 사무실을 개소했다는 것이다. 정치부 기자들은 물론 각 기관 정보팀까지 나서 그의 사무실 찾기에 나섰다.
이와 관련, 안씨와 선후배 사이인 청와대 모 행정관은 “사면·복권 이후 운신의 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실을 개소했다는 건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안씨와 친분이 두터운 백원우 열린우리당 의원은 “사무실을 개소한들 ‘백수’아니냐”고 했다. 이렇다 할 직책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역할을 하겠느냐는 얘기다.
안씨를 잘 아는 정치권 인사는 “얼마 전 ‘국민참여1219’ 여의도 사무실을 방문한 것으로 안다”면서 “이를 본 사람들이 안씨의 사무실로 착각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안씨의 여의도 사무실 개소설은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낳은 웃지 못할 해프닝인 셈이다.
그렇다 해도 안씨의 여의도 동선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노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이 정리되지 않은 정계개편 논의에서 안씨가 접촉한 노사모, 국민참여1219 등은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물론 우리당 친노진영이 현실 정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력, 그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노사모 재규합에 성공한다면 2007년 대선에서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안씨가 언제까지 낮은 포복자세를 취하고 있을지도 미지수다. 드러내놓고 우리당의 실패를 인정하는 당 지도부와 대선주자들을 감안한다면 안씨의 물밑 잠행은 곧 끝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