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닥치자 ‘나부터 살자’갈지자 행보
국감 증인 은행장들의 굴욕
2008-10-29 조경호 기자
미국 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위기가 세계 금융시장을 덮치고 있다. 전 세계 금융 CEO들을 혹독한 ‘굴욕의 계절’을 맞게 하고 있다.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던 시절이 언제였느냐는 듯, 요즘은 온갖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돼 버렸다. 보너스는커녕 약속 받은 연봉도 깎이고, 분초를 다투는 금융위기를 막기도 바쁜 와중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혼쭐이 나고 있다. 이는 국내는 물론 세계 금융CEO들이 겪고 있는 일상이다.
지난 10월 17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장.
키코(KIKO·통화옵션상품)사태를 추궁하는 의원들의 질의가 매서웠다. 하지만 정작 증인으로 참석해야 할 시중은행장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만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만이 홀로 증인으로 참석했다. 김정태 하나은행장, 신상훈 신한은행장, 데이비드 에드워즈 SC제일은행장, 리처드 워커 외환은행장 등 4명은 국제통화기금(IMF)총회 참석 등의 이유를 대고 불참했다.
이날 국감장은 키코 사태에 대한 은행권의 책임을 둘러싸고 날선 공방이 오갔다.
은행권이 금융위기 상황에서 안전판 역할을 하기는커녕,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악화시키고, 환율 급등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국감증인으로 채택되고도 불출석한 은행장들을 대표해 참석한 하 행장이 ‘총알받이’ 마냥 집중 추궁을 받았다.
고승덕(한나라당)의원의 “키코 상품의 불완전 판매는 ‘범죄행위'에 해당한다"는 주장에 대해, 하 행장은 “기업이 손실을 입었다고 은행이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키코는 오버 환헤지를 하지 않았다면 당시로서는 최선의 환헤지 상품이었다”고 해명했다.
키코 상품에 은행들이 꺾기를 했다는 지적에 대해 하 행장은“고객에게 협박성 상품을 판매한 적이 없다. 키코 사태는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아닌 경제적 문제이다. 은행은 ‘갑’의 입장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날 불출석한 은행장들이 일부러 국감을 회피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김정태 하나은행장, 신상훈 신한은행장, 데이비드 에드워즈 SC제일은행장, 리처드 워커 외환은행장 등과 함께 출장을 갔던 윤용로 중소기업은행장, 진동수 수출입은행장 등은 17일 에 귀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국정감사 때문에 출석해야 할 김정태, 신상훈, 데이비드 에드워즈, 리처드 워커 은행장 등은 국감 날을 피해 귀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은행의 부도덕성이 외환위기 불러
정부와 시장이 은행을 보는 눈이 싸늘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몸집 부풀린 은행들이 금융위기가 오자 ‘나 혼자 살겠다’며 딴짓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은 지난 97년 IMF 외환위기 때에 정부로부터 45조원의 공적자금을 얻어 썼다.
은행은 공적자금 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 보증지원을 받고 있다. 정부의 보증을 통해 무차별하게 해외에서 돈을 차입을 할 수 있다. 만약 은행이 해외 차입금을 제때 갚지 못하면 보증을 섰던 정부가 갚아야 한다. 결국 국민 혈세로 은행의 경영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메우고 있는 셈이다.
국민의 혈세로 성장을 거듭한 은행들은 중소기업과 일반 서민에게는 가혹하리만큼 냉혹한 장사를 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중소기업에 환투기 상품이나 다름없는 환헤지 상품인 키코(KIKO) 판매를 강요, 금융 위기의 제1차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실제 일부 중소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은행원에 권유에 따라 키코 상품에 가입하는 꺽기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은행은 미국 발 금융위기가 국내에까지 밀어닥치자 중소기업에 강매나 다름없이 팔았던 키코 상품 부실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나, 기업에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한 시중은행의 파생상품 담당자는 “기업들이 환헤지를 위해 써오던 선물환에 비해 키코 수수료가 두 배 이상까지 높아 은행들이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다”면서 “사실상 환투기 상품인 것을 환헤지 상품인 것처럼 판 은행들이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은 건전성을 관리한다면서 중소기업, 개인사업자 등에 대한 대출을 축소하고, 신용 등 리스크 관리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기업에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중소기업의 줄도산이 예고되는 상황에 이르자 이명박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비오는 데 우산을 뺏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행들은 저 혼자 살겠다며 무더기로 우산을 몽땅 회수하고 있다. 자금 경색이 심화되면서 IMF보다 더한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은행의 대출 장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자금난에 빠진 중소기업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경쟁적으로 기업대출에 나섰던 시중은행들이 최근 대출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은 돈 구할 데가 없다고 난리다. 돈줄이 꽉 막혀버렸다. 은행 문턱은 높아지고, 자금 조달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울며 겨자먹기로 사채를 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천시 남동공단에 있는 한 업체는 최근 거래 은행으로부터 공장 등을 압류를 당했다.
자금난으로 지난달 키코 정산액 8000만원을 제때 못 냈다는 이유에서다. 기존 대출 연장은 물론 신용장 개설까지 거절을 당했다.
이 회사 대표는 “앞 뒤 꽉 막아 놓고 돈만 갚으라니 아예 죽으라는 얘기”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은행의 도덕적 해이 심각
가계 불만도 위험수위이다.
부동산 담보대출이나 개인 마이너스 대출이 막혔기 때문이다. 연장을 하기 위해선 대출이자를 높이기나 일정부분까지 상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 문턱이 높아지면서 제 때에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 부도가 나거나, 흑자 부도를 내고 문을 닫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개인들도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은행 곳간이 비어 가는데도 은행임원들은 돈 잔치를 벌였다. 일부 시중은행 행장의 연봉이 20억 원대에 이른 것으로 공개됐다.
국회 정무위 신학용 의원(민주당)은 <2007년 국내 4대 시중은행 임원 연봉 자료>(금융감독원)를 통해 “지난해 국민은행장의 연봉이 20억2500만원에 달했다. 하나은행장이 10억800만원, 우리은행장이 9억400만원으로 뒤를 이었고, 신한은행장은 성과급을 제외한 연봉이 6억8100만원으로 집계됐다. 또한 상근 감사의 연봉도 국민은행이 7억560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우리은행(5억1100만원), 하나은행(4억1000만원), 신한은행(4억900만원) 순 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경영진이 받는 스톡옵션은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스톡옵션까지 적용한다면 금액은 훨씬 많아질 것이라는 게 금융권 관계자에 전언이다.
은행의 고배당 잔치도 여론에 도마에 올랐다.
국민 신한 우리 하나 외환 SC제일 씨티 등 7개 시중은행은 2005∼2007년까지 26조110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지난해는 9조3631억원으로 급증했다. 올 상반기엔 4조4886억원 순익을 냈다.
고배당 장치 주인공은 외인주주
외국인 주주에게 지급한 배당금도 폭증했다. 7개 시중은행의 2005년 배당 총액 1조3659억원의 44%(6139억원)가, 2006년 3조21억원의 68%(2조620억원)가, 2007년에는 2조4341억원의 71%(1조7345억원)가 외국인 주주 몫으로 배당되었다.
한마디로 국민을 상대로 벌어들인 수익을 외국인에게 퍼준 셈이다. 외국인 지분이 높은데다, 이들이 고배당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은행 경영진에 ‘돈 잔치’‘고배당’ 뉴스가 알려진 뒤,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이 팽배하다.
정부나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선 은행이 대출 경쟁으로 벌어들인 고객의 이자로 ‘돈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비판여론을 의식한 은행들은 지난 22일, 전국은행장모임을 통해 임원임금 삭감, 지점 통폐합 등 경영합리화 방안을 잇 따라 발표했다.
우리금융그룹은 계열사의 임원 급여를 10% 삭감했다. 조직효율화를 위해 과감한 중복점포 통폐합, 점포신설 억제, 적자점포 폐쇄 계획을 발표했다.
국민은행, 기업은행, 하나금융, 신한은행 등도 은행장, 임원들에 연봉 삭감, 지점 관리 등 강도 높은 경영합리화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은행권의 경영합리화 방침이 구조조정에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구조조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생색내기용 불과… 실질적 조치 필요 지적
외환위기 당시처럼 공적자금이 직접 투입된 것도 아니어서 정부와 정치권이 직접 나서 구조조정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또 노조의 반발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KDI 김현욱 연구위원은 “은행들이 그동안 자산 불리기에 전념하느라 과도한 경쟁을 하면서 리스크 관리에 소홀하고 위기에 대비하지 못했다”며 “금융위기 상황인 만큼 일단은 금융체계의 핵심인 은행을 지원하되 사후로 책임 소재를 가려 부실 분담 원칙을 세워서 철저히 문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보에서 했던 것처럼 공적자금 손실을 초래했던 은행 경영진에 대해 소송을 진행하거나 한국은행에 지급보증을 받는 은행의 외화자산을 담보로 맡기는 등 사후대책이 절실하다”면서 “향후 문제가 생길 경우 경영진의 임금에 패널티를 주거나 손실이 날 경우 주주배당을 하지 않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네북 된 금융 CEO들
미국 발 금융한파가 전 세계로 번지며 금융CEO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임금을 삭감하고 보너스를 포기하고 있다. 또한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사 회장은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스위스 최대은행 UBS의 페터 쿠러 회장는 "UBS가 금융위기 손실에서 회복될 때까지 보너스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의 연봉은 약 200만스위스프랑(약 26억원). 포기한 보너스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수십만 프랑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요제프 애커만 회장도 "나보다 돈이 더 필요한 직원들을 위해 올해 보너스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발표 직후 다른 이사 3명도 보너스 반납을 선언했는데 이들 4명의 지난해 연봉 합계는 3,300만유로(약 560억원)이며 이중 보너스는 430만유로였다.
구제 금융을 투입한 각국 정부의 압박도 거세다.
독일은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은행의 경영자 연봉을 50만유로(약 8억5,000만원)로 제한하고 보너스와 배당금 지급도 공적자금 상환 때까지 금지하기로 했다.
미국에서도 얼마전 구제금융을 받은 AIG가 CEO의 각종 보수가 적절한지 관련 정보를 검찰에 제공키로 했다.
또한 퇴직 예정인 스티븐 벤싱어 최고재무책임자(CFO)에 대한 1,000만달러의 보상금도 지급을 보류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파산 신청을 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CEO 리처드 풀드는 이달 초 외회 청문회에 불려가 혼쭐이 났다.
민주당 헨리 왁스먼 위원장은 "당신 회사는 망했고 경제는 위기 상태지만 당신은 2000년 이후 급료 등으로 4억8,000만달러를 챙겼다. 이것이 온당하냐"고 질타했다.
또한 공화당 마이클 터너 의원은 "월가 최고경영자들이 도둑질을 했다"고 풀드를 상대로 월가 경영진에게 분풀이하듯 모욕적인 질타를 쏟아냈다.
하지만 폴드는 겨우 "리먼 파산은 금융 전반에 몰아닥친 공포의 폭풍우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