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자동차그룹 ‘먹구름’
‘시동’도 걸기 전에 ‘리콜’ 악재
2008-09-26 박지영 기자
갈 길이 바쁜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이 하던 일도 멈춘 채 울상을 짓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은 이후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없고 갈 길은 먼데 하는 일마다 엉망진창 되는 일이 없다. ‘세계 4대 그린카 강국’ 도약을 목표로 끝내야 할 과제는 산더미인데 주변에선 사사건건 태클이다. ‘시동’도 걸기 전에 ‘리콜’할 위기에 놓인 현대·기아차의 현 시점에 대해 살펴봤다.
국내 완성차 시장의 ‘맏형’격인 현대·기아차그룹이 끊이지 않는 악재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대형악재에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불행의 시작은 지난 8월 27일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현대자동차는 연료펌프에 이상을 보인 엘란트라(아반떼의 미국수출명) 6만5000대에 대해 미국시장에서 자발적 리콜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 웹사이트에 게재된 서한에 따르면 이번 리콜대상은 2.0ℓ베타엔진을 장착한 엘란트라 2008년형 모델로 지난해 11월 5일부터 올 6월 28일 사이에 제작된 차량이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 측은 이번 리콜로 인해 약 58억원의 손실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 넘어 산
현대·기아차그룹의 혹독한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연평균 30% 성장률을 보이며 해외공장 6곳 중 가장 호조를 보이던 인도법인은 최근 노노갈등으로 인한 노사분규로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인도법인은 2000년 이후 정몽구 회장이 매년 한 차례 이상 방문해 격려할 정도로 정성을 쏟는 곳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번 노사 분규로 인해 그동안 우호적이었던 현지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현대차에 등을 돌리는 분위기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중국시장에서의 고전도 현대·기아차그룹으로선 큰 고민거리다. 지난 2004년 전체 판매량 2위까지 올라갔지만 지난해 8위로 밀려났다.
그렇다고 반전의 기회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실제 올 상반기 현대차는 중국시장에서 전년 대비 NF쏘나타와 EF쏘나타의 판매량은 각각 31.2%와 12.5%, 엑센트는 3.5% 줄었다.
중국시장의 성적은 그나마 낫다. 일본시장에서의 현대차 점수는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 국내 완성차 업체 중 유일하게 일본에 진출한 현대차는 5년 동안 줄곧 참패를 기록했다.
현대차의 일본 판매량은 지난 2004년 2524대로 정점을 찍은 후 △2005년 2295대 △2006년 1651대 △2007년 1223대로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올 상반기 실적은 고작 240여대에 불과하다.
한편 현대차는 5월부터 주력모델인 쏘나타와 아반떼 판매를 전면 중단하는 등 일본 영업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 ‘깜짝인사’ 후폭풍
“인사가 망사” 글로벌 일류 이미지 먹칠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란 말이 있다. 백보를 물러간 사람이나, 오십보를 물러간 사람이나, 도망간 사실에는 양자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이 속담에 딱 들어맞는 두 사람이 있다. 국내 재계서열 2위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을 이끄는 정몽구(MK) 회장과 김용문(WM) 부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올 4월 초의 일이다. 당시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고 있던 MK는 돌연 WM를 불러 그룹 부회장 자리에 앉혔다. WM이 현대를 떠난 지 꼭 10년만의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WM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그룹 핵심자리를 내줬다는 점이다. 당시 WM은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우스개소식을 재계 호사가들이 놓칠 리 없다. 그들은 “10년 만에 불러올린 사람이 고작 자기(MK)와 똑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WM이냐”며 비아냥대기에 바빴다. 그러나 현대·기아차 측은 일각의 시선이야 어찌됐든 “어차피 이곳에서 횡령한 것도 아니고 별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정몽구(MK) 회장의 독특한 인사스타일이 재계 호사가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 회장의 인사스타일은 ‘럭비공 인사’로도 유명하다. 때 아닌 ‘깜짝 인사’는 물론, 내용도 가히 파격적이다.
임명한 지 1년도 안된 사장을 단칼에 경질하는가 하면, 쫓아냈던 임원을 다시 불러 중용하기도 한다. 현대·기아차 내부에서 ‘현대차 임원은 임시직’이란 말이 나도는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 회장의 인사스타일은 이른바 ‘엘리베이터 인사’로 불린다. 한 임원이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정 회장과 마주쳤을 때 “아니, 자네 아직도 회사 다니나”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목이 잘리기 십상이다.
반대로 “그 사람, 요즘 왜 안 보이나”하면 죽었던 사람도 되살아난다. 한 마디로 예측불허인 셈이다.
재계 호사가들은 MK식 인사스타일에 대해 “국내 최대 자동차그룹 인사로 보기엔 너무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예측불허 인사에 당혹
이런 정 회장의 ‘럭비공 인사’가 드디어 일을 냈다.
지난 4월 1일 현대·기아차그룹은 김용문 전 현대우주항공 사장을 부회장으로 선임하고 그룹 기획조정실장에 임명했다. 그룹 경영전략과 인사를 책임지는 핵심 요직으로 그룹 내 2인자 자리다.
그러나 재계 안팎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김 부회장은 1998년 현대우주항공 사장을 끝으로 무려 10여년 간 현대·기아차그룹과 인연을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김 부회장의 ‘깜짝 인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MK식 인사스타일이 다시 한 번 발휘된 셈이다.
당시 현대·기아차그룹 측은 “누구보다 정몽구 회장을 잘 알고 있으며 정 회장도 김 부회장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며 “또한 오랜 연륜과 경륜을 갖춘 분으로서 이번에 부회장에 발탁된 것”이라고 설명,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문제는 김 부회장이 진정 ‘신뢰’ 할 만한 사람이냐는 것이다. 답은 물론 ‘아니다’에 맞춰진다.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은 지난 9월 2일 김 부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 부회장은 자동차 부품업체인 비앤테크를 운영하면서 지난 2004년에서 2007년에 걸쳐 거래처에 물품대금을 지급한 것처럼 허위세금계산서를 발급받아 회계 처리하는 수법으로 회삿돈 11억2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비자금 조성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명령 300시간을 받은 바 있는 정 회장이나 김 부회장이나 그야말로 ‘오십보백보’인 셈이다.
여기서 하나 걸고 넘어갈 게 있다. 바로 정 회장이 김 부회장의 횡령 혐의를 알고도 임명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 선임했는 지다. 답이야 어찌됐든 그룹 측에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알고도 임명했다면 도덕적 해이 논란이 예상되고, 몰랐다고 해도 그룹 조사능력 부재 논란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 비자금 조성 내막
그도 그럴 것이 김 부회장의 비자금 조성 의혹은 지난해 말부터 일기 시작했다. 실제 검찰은 지난해 12월 14일 봉고차를 동원해 비앤테크를 압수수색한 바 있다.
한편 현대·기아차그룹 측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룹 홍보지원팀의 한 관계자는 김 부회장의 비자금 조성혐의에 대해 “솔직히 김용문 부회장을 임명하기 전에 그룹차원에서 조사를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어 그룹 관계자는 ‘그룹 2인자 자리가 정 회장 말 한마디에 쉽게 바뀔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인사와 관련해 경영권자의 의중이 반영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도 “김용문 부회장이 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된 이후 비자금을 횡령한 게 아니지 않느냐. 그 일은 김 부회장 개인의 문제지 그룹이 나서서 가타부타할 사항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