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그룹 ‘형제의 난’ 점입가경
창업주 부인 아직도 지하에서 운다
2008-07-09 박지영 기자
고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 장남과 3남 간 미묘한 갈등이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2년 전 작고한 고 여귀옥(고 김수근 창업주의 부인) 여사의 대성산업 주식은 여태 그의 명의로 되어 있다. 유가족들이 서로 “내 것”이라며 치열한 지분다툼을 벌이고 있는 까닭이다. 고 김수근 명예회장이 작고한 직후 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3형제 간 진흙탕 싸움을 벌이더니,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형제간의 소원한 관계가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 ‘세월이 약’이라던데 대성의 형제들만큼은 세월을 비켜간 모양새다. 피비린내 나는 두 형제의 경영권 다툼 속으로 들어가 본다.
1947년 5월 10일 대성그룹 창업주인 고 김수근 명예회장은 직원 2명과 작업인부 10명을 부려 대구시 칠성동에 수동식 연탄 생산기계를 설치, 연탄을 찍어 팔면서 지금의 대성그룹을 일궜다.
이후 석탄사업에서 석유, 가스, 열병합 발전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며 대성그룹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70년대 초엔 국내 10대 그룹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사세가 대단했다.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었던 기업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성그룹은 연탄산업의 몰락과 이에 따른 변신이 늦어지면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2000~2001년 사이엔 연이은 계열 분리로 그룹 규모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던 2001년 대성그룹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창업주인 김수근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한 것이다.
형제 간 분쟁 막으려는 창업주의 유언
재계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고 김수근 명예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장남 영대는 대성산업을, 차남 영민이는 서울도시가스를, 3남 영훈이는 대구도시가스를 맡으라”고 유언까지 남기는 등 형제간 분쟁의 소지를 없애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고인의 뜻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수근 명예회장이 작고한 직후 삼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다. 갈등의 시작은 김 명예회장이 세상을 등진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주의 유언을 무시한 채 세 아들의 피 터지는 지분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번 패인 형제간 감정의 골은 그룹의 명칭과 직함을 두고 장남과 3남이 매번 ‘기 싸움’을 벌이는 등 쉽게 아물지 않았다.
지난해 열린 창립 60주년 기념식만 봐도 두 형제간 감정의 골이 어느 정도 깊은지 가늠하고도 남았다.
창업주의 아들로 대성그룹을 이끌고 있는 2명의 회장이 각자 행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성대해야 할 그룹 환갑잔치가 ‘철없는’ 두 형제로 인해 조촐하게 진행됐다.
이와 관련 장남이 경영하고 있는 대성 측 관계자는 “계열이 분리돼 경영을 따로 하고 있으니 기념식도 당연히 따로 하는 것이 맞다”면서도 “그러나 대성
그룹의 모체인 대성산업이 60주년이지 대구도시가스가 60주년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관계자는 이어 “대성산업을 이어받은 장남인 회장님이 기념식을 하는 것이 맞지 우리가 주인인데 왜 저쪽에서 잔치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대구도시가스의 경우 83년도에 계열 분리해 올해로 24주년”이라고 덧붙였다.
3남인 김영훈 회장이 대외적으로 대성그룹 회장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 관계자는 “예를 들어 삼성그룹도 아닌데 아무나 쓰면 되겠느냐”며 “현재로서는 셋째 회장이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 김영대 회장님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창업주 유언 무시 지분싸움 격화
하지만 3남인 김영훈 회장 측은 “선대 회장님의 뜻에 따라 대성그룹이라는 상호명을 쓴 것”이라며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형제간 지분 다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년 전 작고한 고 여귀옥 여사의 재산이 제대로 상속절차를 밟지 못한 채 공중에 붕 떠있는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여 여사는 대성그룹 창업주인 고 김수근 명예회장의 부인이다.
고 여귀옥 여사는 19세 때인 1942년 고 김수근 대성그룹 명예회장과 결혼했다. 이들의 인연은 대구 ‘남산교회’에서 맺어졌다. 김 창업주의 모친인 기묘임(작고) 여사와 여 여사의 모친인 최성연(작고) 여사가 남산교회의 신도였다.
그렇다고 결혼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김 창업주는 당시 대구상고를 중퇴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던 반면 여 여사는 당시 대구 신명여고를 거쳐 1938년 평양여자신학교를 수료한 ‘신여성’이었다.
또 여 여사 집안은 대구에서 유명한 기독교 집안이자, 명망 높은 집안의 여식이었다.
고인 주식 대성산업 15만주(150억원) 어디로?
그러나 여 여사의 모친인 최 여사는 “내가 딸이 둘이면 하나는 부잣집에 하나는 인격을 보고 결혼 시키겠는데 단 하나밖에 없으니 인격을 봐야겠다”면서 주변의 반대를 물리고 김 창업주를 사위로 맞았다.
59년간 함께 한 부부는 2001년 고 김수근 명예회장이 별세하면서 헤어지게 됐다. 그로부터 5년 후 고 여귀옥 여사마저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룹명칭 사용 문제로 미묘한 갈등을 빚고 있던 대성의 3형제는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장남 김영대 대성 회장과 차남인 김영민 SCG그룹 회장은 모친인 여귀옥 여사가 별세한 2006년 3월 20일 낮 12시 17분부터 서울대학병원 영안 5호실을 함께 지켰다.
해외출장 중이던 3남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은 22일 급하게 항공편을 마련해 귀국, 이날부터 모든 장례절차에 참석했다.
고 여귀옥 여사의 영결식은 그해 3월 23일 오전 8시 중구 저동에 위치한 영락교회 본당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1-1 영락교회 공원묘지 고 김수근 명예회장 묘에 합장됐다.
이때까지도 장남 김영대 회장과 3남 김영훈 회장은 적통문제를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거의 남남처럼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큰일’을 치르고 난 뒤 대성 형제간 다툼은 수그러든 듯 보였다. 그러나 재계 호사가들 사이에서 최근 고 여귀옥 여사의 이름 석자가 오르내리며 또 다시 대성 삼형제에게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재계전문사이트인 <재벌닷컴>이 6월 말 발표한 ‘100대 여성주식부호’에 고 여귀옥 여사의 이름이 78위에 당당히(?)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실제 올 5월 15일 대성산업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고 여귀옥 여사는 아직도 이 회사 보통주 15만2689주(2.98%)를 변함없이 소
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은 사람이 마치 산 사람처럼 공문서에 버젓이 기록돼 있는 것이다.
7월 4일 현재(2시16분) 대성산업 종가는 1주당 10만1500원. 고 여귀옥 여사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면 약 154억9793만원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주식이 상속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된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하다.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유가족들이 서로 “자기 것”이라며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족 측은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일단 장남 김영대 회장이 이끄는 대성 측 관계자는 “이미 유족들끼리 협의하고 끝난 일”이라며 “어차피 상속문제는 법적 지분율이 있으니까 ‘니꺼’ ‘내꺼’할 문제가 아니다”고 딱잘라 말했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상속을 미뤄온 이유에 대해서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서로 바쁜데다 급하게 서둘지 않아도 될 사항이라 판단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에둘러 말했다.
이와 관련 3남 김영훈 회장의 대성그룹 측 관계자는 “상속절차를 미뤄왔다고 해서 세금을 덜 내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분 재산을 금방 처분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아니겠느냐”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장남 김영대 대성 회장은?
50억 들고 튄 직원 찾아 미대륙 9000마일 종횡단
김영대 대성 회장은 대기업 회장답지 않게 사내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하다.
김영대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안정’과 ‘보수’로 대변된다. 이 때문에 간혹 김 회장 주변을 ‘경로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그룹과는 달리 유난히 60대 이상 임직원들이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일례로 ‘비서계의 대모’로 통하는 전성희(65) 이사는 김 회장을 모신지 올해로 ‘30년’째다. 또 김 회장의 운전기사인 정홍(66) 차량관리 과장도 40년 이상 됐다. 이는 김 회장의 인재를 아끼는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그렇다고 김 회장을 ‘호락호락’하게 봐선 안 된다. ‘아니다’싶을 때는 무서울 정도로 강한 집념을 보인다.
때는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성의 한 직원이 씨티은행으로부터 50억원을 불법 대출받아 미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김 회장은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0억원의 돈도 돈이지만 회사의 신용과 조직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그 직원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더욱이 일개 직원에게 거액의 수표를 무책임하게 내준 은행 측으로부터 음모론까지 흘러나오자 김 회장은 ‘대추적’을 결심
했다.
결국 그는 10개월 만에 그 직원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김 회장은 미국 출장만 9차례, 체류기간 200일, 미대륙 종횡단 9000마일, 만난 사람만도 1000여명이 넘었다.
## 3남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은?
늦장가 갈 정도로 알아주는 공부벌레, 학위도 여러 개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은 조용한 말소리와 차분한 몸가짐, 설득조의 언어구사 등에서 CEO보다 목사 같은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김 회장의 어릴 적 꿈은 목사였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영락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늦장가를 갈 정도로 공부에 푹 빠져 살았다. 그가 받은 학위만도 법학, 경제, 경영, 신학 등 4개나 된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에 이어 미국 미시간대에서 법학·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하버드에서 신학과 국제경제학 석사 학위를 땄다. 기업경영을 하면서도 그는 늘 책과 씨름하는 것이 취미다.
김 회장은 모기업인 대성과 계열분리 후 대구도시가스를 주력으로 경북도시가스와 바이넥스트창업투자 등 19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