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전선 제조업체야? 사채업체야?

은둔그룹 대한전선 이상한 ‘M&A 사업’

2008-05-07     박지영 기자

자금난에 봉착한 기업들이 명동 사채시장 대신 대한전선그룹으로 향하고 있다. 대개 제1,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구할 수 없는 한계기업들이 찾는 최후의 보루는 명동 사채시장이다. 하지만 명동에 맞먹는 새로운 급전 창구로 대한전선이 급부상하고 있어 이목이 집중된다. 기업 간 사적 금융거래를 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사채업자’, 또는 ‘무면허 대부업체’로 지칭할 만하다. 그런데 사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한전선으로부터 급전을 빌린 회사 대부분이 결국 대한전선에 흡수합병 됐다는 점이다. 대한전선의 독특한 M&A방식에 대해 살펴봤다.

급전이 필요한 기업들이 대한전선을 찾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도 직전까지 몰린 기업들이 대한전선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한 사례들은 이미 입소문을 타고 파다하게 퍼졌다.

대한전선 스스로도 타회사에 대한 각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본업인 전선업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이미 오래다.


독특한 M&A ‘입소문’

실제 대한전선은 2002년 무주리조트를 시작으로 진로 정리채권(2003년), 쌍방울(현 트라이브랜즈, 2004년) 등 매년 ‘대어급’ 매물을 낚아갔다.

지난해에도 명지건설 인수(500억원)를 비롯, 무주기업도시 출자(440억), 이탈리아 전선업체 프리즈미안 지분 인수(5200억원) 등 적극적인 투자활
동을 벌였다.

하지만 대한전선은 다른 M&A 사례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동원해 눈길을 끈다.

시장에서 지분을 인수하는 게 아니라 지분이나 우량 물건을 담보로 잡은 후 자금을 대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부도 등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고자 하는 기업 오너들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 급전을 융통해 준 뒤 기회를 봐서 회사를 통째로 넘겨받는 식이다.

한계기업 킬러란 지적이 나오는 까닭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독특한 ‘대한전선 표’ 인수합병 사례는 쌍방울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한전선은 쌍방울의 우선협상 대상자인 SBW홀딩스란 회사에 200억원을 빌려준 후 이를 돌려받지 못하자 주식으로 대신 받아갔다.

이후 대한전선은 야금야금 이 회사의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대한전선은 SBW홀딩스의 최대주주가 된 동시에 쌍방울까지 얻게 됐다.

또 대한전선은 지난해 시공능력 평가 188위인 영조주택에 203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빌려주고 원금 이상의 수익을 보장받는 대신 영조주택 지분 100%를 담보로 받았다.

사업을 잘하면 5년간 100% 넘는 수익을 얻는 것이고, 사업이 안 되면 직접 인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또 급전을 빌려주더라도 곱게(?) 빌려주지 않았다. 상대 회사의 애간장을 녹일 대로 녹여 약을 올렸다.

신구건설이 바로 이 같은 사례다.

지난 2월 26일 신구건설 자금부 고위관계자는 최종부도를 모면하기 위해 대한전선을 급하게 찾았다. 그 자리에서 신구건설은 판교신도시 등의 우량사업장을 담보로 내놨다.

그러나 대한전선은 쉽게 자금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밤새 담보로 제공된 물건에 대한 확인 작업을 거치며 신구건설의 애를 태웠다.

결국 대한전선은 다음날 새벽 무렵 25억원의 자금지원을 약속했다. 자금지원 규모의 3배에 달하는 담보를 잡고서야 신구건설을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신구건설이 정상화되면 상관없으나 자칫 하나 문제가 발생할 경우 담보로 잡은 사업장을 매각하거나 직접 회사를 인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간장 태울 대로 태워

이번에 인수한 남광토건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전선은 남광토건을 직접 인수하는 대신 이 회사 대주주인 알덱스 지분을 지난해 말 대거 사들였다.

이때도 대한전선 식 ‘대부업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대한전선은 알덱스에 408억원을 빌려주는 대신 이 회사 주식 468만여주를 볼모로 저당 잡았다. 이후 유상증자에 참여해 추가로 이 회사 지분을 흡수했고, 결국 인수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전선이 아무 곳에나 자금을 푸는 것은 아니다.

지난 2월 28일 1차 부도를 낸 우영은 대한전선에 ‘팽’당한 사례로 꼽힌다.

우영은 1차 부도를 앞두고 대한전선 본사를 방문해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 1차 부도일인 28일과 다음날인 29일 고위 임원이 대한전선을 직접 찾아 최종 부도를 모면하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업방식

하지만 우영의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대한전선은 자금 대여를 거부, 결국 우영은 최종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됐다.

지난 2월 문을 닫은 분당상호저축은행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중소기업 대출관리 부실로 감독당국으로부터 6개월 영업정지명령을 받기 직전인 지난해 12월. 당시 분당저축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인 자기자본비율이 5% 밑으로 떨어지는 등 총체적인 위기 국면에 봉착했다.

이를 막기 위해 분당저축은행은 대주주들에게 유상증자 참여를 요청하는 등 다각도로 경영정상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이에 마지막으로 기댄 곳은 대한전선. 당시 분당저축은행 CEO는 경영권 양도를 조건으로 100억원 우선 증자 후 단계적으로 500억원을 투자하는 지원안을 대한전선에 요청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다.

이러한 대한전선의 돈 놀음에 재계는 물론 명동 사채시장 또한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다.

이와 관련 명동사채 쪽의 한 관계자는 “대한전선이 거액의 여유 자금을 사실상 사채로 굴리고 있는 걸 보면 제조업체인지 대부업체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한전선 독특한 경영방식

지난 2004년 9월 고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의 사망 이후 대한전선은 무려 1,355억원의 상속세를 자진 신고해 재계뿐만 아니라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설 전 회장 유족들의 ‘성실 납부’는 변칙 상속이나 증여로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다른 재벌들과는 대조를 보였던 것이다.

과거 재계 5위에까지 진입했던 대한전선은 1955년 설립 이후 개발하는 제품은 거의 모두 국내에서 최초로 개발되는 제품일 만큼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전선공업을 이끌어 왔다. 하지만 규모에 걸맞지 않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 중 하나다. 대한전선은 대한그룹의 창업주인 인송 설경동 회장이 설립했던 회사로 3남 고 설원량 회장이 1972년 물려받았다.

승승장구하던 대한전선이 2004년 3월 그룹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2세였던 설원량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등진 까닭이다. 3세 경영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경영권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고, 무려 1355억원의 상속세를 물고 3세들이 지분을 물려받았다. 당시 대한전선그룹은 최고 상속세를 납부했던 기업으로 회자됐다.

설 회장의 부인인 양귀애씨가 남편을 대신해 대한전선 오너로서 경영을 책임졌다. 양 명예회장은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의 여동생이기는 하지만 고 설 회장과 결혼한 후 단 한 번도 회사경영에 관여한 적 없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양 명예회장은 현정은 회장과 친분이 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 모두 ‘남편을 사별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짧은 시간에 아주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현 회장과는 세계경영연구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함께 다니며 처음 만난 이후 사석에서 자주 만나며 우의를 다지고 있다.

양 명예회장은 현재 경영 일선에는 한 발짝 물러난 모양새를 띄고 있다. 여기에는 대한전선에 전문경영인인 임종욱 부회장이 그룹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버팀목으로 양 명예회장의 공백을 착실히 메워나가고 있다.

임 부회장은 특히 M&A에 남다른 재주를 과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무주관광레저형 기업도시 추진 기업으로 선정돼 그룹 성장잠재력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현재 대한전선은 전문경영인 임종욱 부회장이 사실상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양 명예회장은 장학재단과 문화재단 사업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대한전선에서 특이한 점은 소유와 경영의 조화를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임 부회장에 대한 양귀애 명예회장의 신뢰가 조직융합에 큰 힘이 된다는 게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게다가 임 부회장은 3세 설윤석씨가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게 지도자 역할까지 책임지고 있다.

윤석씨는 지난 2005년 3월 대한전선 STS국내영업팀 과장으로 입사해 현재 경영전략팀 차장으로 후계자 수업에 열중이다. 차남 윤성씨는 미국에서 학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대한전선은 양귀애 명예회장이 경영일선에 나서지 않는 한 전문경영인 체제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임종욱 부회장이 고 설원량 회장으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고, 지금까지 임 부회장의 경영성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교체할 명분도 약해 보인다.

하지만 3세 윤석씨의 경영 수업이 끝나는 시점이 되면 전문경영인 체제가 지속될지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