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전두산 회장 국제스포츠계 사퇴 내막

2007-09-20     박지영 
화장실 다녀왔으니 그만?

국제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됐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그동안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던 박용성 전두산그룹 회장(현두산중공업 회장)이 국제유도연맹(IJF) 회장직에서 전격 사퇴하면서 IOC 위원직도 자동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저간의 관심은 ‘국제올림픽위원회 박용성 위원’에서 자연스럽게 ‘경영인 박용성 회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경영 일선 복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박 회장의 ‘잘 짜여진 스케줄’을 따라가 봤다.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점 깊이 반성하고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책임을 통감하고 경영 일선 및 국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2005년 11월 4일)

“은퇴했는데 (경영) 복귀는 무슨 복귀…. 2014년 평창올림픽을 유치하는 게 가장 큰 과제다. (올림픽 유치 지원을 위해) 지난주엔 유럽에 다녀왔는데 이번 주말에는 또 다른 지역으로 갈 것이다. 나그네처럼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다.”(2007년 2월 9일)

“내가 은퇴한 것도 아니고, 주식 한 주도 팔지 않았는데 대주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대주주인데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2007년 2월 12일)

여러 사람의 입에서 전해져 내려온 말이 아니다. 단 한 사람,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석고대죄’할 것 같았던 이 사람은 15개월 만에 “대주주 역할을 분명히 할 것”이라며 경영 복귀 방침을 시사했다. 그것도 ‘특별사면’ 받은 지 단 3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케줄 관리 한번 끝내줘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2005년 11월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머닛돈처럼 빼먹은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아 그룹 회장직은 물론 IOC 위원 자격도 정지됐다.

그러던 올 2월 25일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을 맞아 특별사면을 단행했고, 확정된 특별사면·복권 대상자에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을 포함시켰다. 당시 정부는 “올해가 IMF 외환위기 발생 10년째 되는 해”라는 점을 들어 “경제인들을 대거 사면시켰다”고 발표했지만, 박용성 전 회장이 청와대로부터 사면장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평창올림픽 유치 활동 지원’의 의미가 더 컸다. 그가 IOC 위원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셈. 실제로 박 전 회장 또한 스스로 “사면이 이렇게 빨리 될 줄 몰랐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국가의 ‘이유 있는’ 부름을 받들고, 남들 보다 빨리 자유의 몸이 된 박 회장은 유럽과 남미를 오가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매진하는 듯 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박 회장

그러던 지난 9월 7일, 한국 스포츠외교전에 큰 기여를 해줄 것만 같았던 박용성 전 회장이 갑작스레 국제스포츠계 총사퇴 의사를 내비쳤다. 박 회장은 두산 관계자들이 맡고 있는 국제유도연맹(IJF) 비서실을 통해 IJF 회장직을 내놓고 앞으로 그룹경영에만 몰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박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직도 자동 상실하게 됐다.

두산그룹에 따르면 12년 동안 국제유도계를 이끈 박 회장이 남은 임기 2년을 포기한 채 물러난 가장 큰 이유는 유럽연맹과 계속된 갈등 때문이다. 전체 197개 회원국 중 가장 많은 50개국이 포진한 유럽연맹은 4~5년 전부터 루마니아 출신 비저 마리우스 회장을 앞세워 박 회장에게 반기를 든 것. 지난 2005년 회장선거에서 박 회장과 맞선 마리우스 회장은 선거에 패하자 ‘부정이 있다’면서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이의신청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두산그룹 홍보팀 관계자는 “스포츠계를 완전히 떠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후진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일 뿐”이라며 “또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서포트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체육계 떠나는 박용성 회장

경영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서도 그는 “그동안에도 늘 그래왔듯이 두산그룹 경영 현안에 시시콜콜 간섭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라며 “다만 대주주로서 글로벌 두산이라는 비전 달성을 위해 자신이 축적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해외시장의 M&A 등 두산 글로벌 경영에 한 발 더 앞장설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두산그룹측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 한국 스포츠계는 박용성 회장의 국제스포츠계 총사퇴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IOC위원 자격정지를 받았다가 13개월 만에 복권돼 지난 7월 강원도 평창의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 힘을 보탰던 박 회장이 끝내 국제 스포츠계에서 완전히 발을 빼게 됨으로서 한국의 스포츠외교력은 급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당면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다시 도전한다고 공식 선언한 상황에서 동료위원들의 표를 끌어 모을 수 있는 IOC 위원직 상실은 한국으로선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평창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결정을 거쳐 3수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이건희 IOC 위원 혼자만의 측면 사격으로는 중국 장춘 등 경쟁도시를 방어하기에 힘이 달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박 회장이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국제유도연맹 내부에서도 한국의 목소리가 약해짐에 따라 올림픽 티켓 경쟁이나 경기 중 심판들의 보이지 않는 힘을 차단하기 어렵게 됐다.

이와 관련, 한 스포츠계 인사는 “사람이라는 게 아무리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틀리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한국 스포츠 외교에 힘이 돼 달라는 의미에서 사면 대상자에 포함시켰더니 정작 자유의 몸이 되니까 경영하기에 바빠 가지고 있던 명성까지 버릴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두산그룹 관계자는 “당시 정부가 밝혔듯 국가 경제를 살리는 데 힘이 돼 달라는 의미에서 박용성 회장이 사면된 것이지 단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