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 업무추진비는 쌈짓돈
2007-09-17 현유섭
‘사물의 객관적인 성질과 눈으로 본 성질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의 시각을 가리킨다.’ 착시의 정의다. 정부기관에서도 착시는 있다. 탁상행정, 뇌물수수 등은 착시가 만드는 부조리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착시현상으로 너무 쉽게 버려지는 돈이 있다. 수장들의 원활한 업무를 위한 업무추진비다. 지방자치단체별 감사에서 항상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 업무추진비다. 업무추진비에 대한 착시 현상이 혈세를 낭비하게 하고 있다. 과연 국가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인 장·차관들의 시선은 온전한 것일까. 본보는 정부 40개 기관의 수장들의 업무추진비를 들여다봤다. 본보의 조사는 차관급 이상 정부부처 40곳의 장·차관 업무추진비(올 1~6월)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업무추진비 인터넷 공개여부는 정부부처 인터넷 사이트 통합검색엔진 검색을 통해 이뤄졌다.
기획예산처의 예산안 작성 세부지침은 업무추진비를 ‘회의개최, 외빈초청·접대, 해외출장 지원 등 특정 사업추진과 체육대회 등 공식행사 수행을 위해 사용되는 접대비·연회비 및 기타 제경비 등에 편성토록 돼 있다.
업무추진비는 지난 1993년까지 특수활동비와 함께 판공비라고 불렸다. 1994년 판공비 비목이 폐지되고 대신 특수활동비와 업무추진비로 개편됐다.
판공비 중 일반 정보비 세목으로 편성 집행하던 부분은 특수활동비로 기타 기관 운영 판공비 세목 등 나머지 판공비 부분은 업무추진비로 편성됐다.
업무추진비는 지난 2004년 업무추진비와 직무수행경비로 개편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월 평균 업무추진비 4억, 경조사비만 5400만원
업무추진비는 각종 의혹과 부정사용에 대한 사례가 많아지면서 구체적인 산출근거와 용도를 밝혀 예산심의를 받아 편성토록 하고있다.
참여정부는 지난 2003년 정보공개에 대한 총리 훈령을 통해 업무추진비를 자발적으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업무추진비의 각종 의혹을 씻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이 지난 2004년 6월 업무추진비 자발적 공개와 세부집행내역 공개를 규정한 훈령 시행 1주년을 맞아 벌인 조사에서 정부 주요부처 8개 기관이 업무추진비를 공개하지 않거나 세부내역이 아닌 총액만을 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방부는 훈령에서 지정한 공객방식을 채택하지 않았고 대검찰청과 국무총리비서실, 국무조정실 등은 반기별로 공개한다는 내부원칙을 이유로 업무추진비를 공개하지 않았다.
과연 정부부처들은 3년전 시민단체의 지적을 받아들였을까. 본보의 조사결과 현재까지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부 부처의 장차관은 업무추진비의 절반을 유관기관과 직원들의 경조사비로 지출하고 있다. 권력형 부처들은 업무추진비를 공개하지 않는 등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하고 있다.
업무추진비를 공개한 21곳의 정부부처 1곳 당 장차관들이 쓰는 한달 평균 업무추진비는 1000여만원에 이른다. 또 장차관들이 업무추진비 중 경조사비로 지출하는 금액도 1곳당 135만원을 웃돌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부처가 40개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차관급 이상 정부 기관장들이 쓰는 업무추진비는 한 달 평균 4억원이 넘고 경조사비도 54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부부처별로 보면 산자부 장차관이 쓰는 월평균 업무추진비는 2000만원을 넘는다. 경조사비는 430여만원으로 업무추진비의 20%를 웃도는 수치다.
국방부 장차관의 업무추진비는 월평균 1900만원대이다. 기획예산처는 1580만여원이며 경조사비 지출 비율은 12%다.
정보통신부 장차관들도 월평균 1300만원이 넘는 돈을 업무추진비로 사용하고 있으며 230여만원을 경조사비로 지출하고 있다.
21개 부처마다 공개기준도 없어
본보 조사에서 업무추진비를 공개한 21곳 정부부처들의 공개방식이 서로 다르다. 특허청과 조달청 등은 지출날짜와 항목을 정확히 기재해 발표하고 있었다. 발표도 월별로 정산해 바로 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과학기술부는 분기별로 발표하고 있다. 세목에 가장 민감한 국세청도 일정날짜에 일괄 정산해 자료를 발표하는 등 시민들이 청장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병무청은 경조사비와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같은 항목으로 처리하는 등 세부적인 항목에 대한 것보다 금액만을 공개하고 있다.
산업자원부와 식품의약품안정청도 업무관련 축·조의금이라는 항목으로 월말에 건수와 금액만 공개하는 등 정확한 지출 내용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국방부는 의문을 남기는 공개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국방부가 공개한 장·차관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보면 공식회의 이외의 위문·격려, 직원 사기진작 등의 비용으로 월 평균 업무추진비의 30%를 지출하고 있지만 세부항목과 비용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성가족부과 경찰청, 중소기업청 등은 업무조사비에서 직원과 유관기관 경조사비 항목이 없는 등 다른 부처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행정자치부와 환경부 장관은 경조사비 대신 고가의 화환으로 대신하고 있다. 행정자치부의 장차관 업무추진비 내역을 보면 장관은 올 들어 유관기관 경조사 화환으로 월 평균 360만원 이상을 썼다.
그러나 지출날짜와 금액을 명시하고 있지만 화환비용으로 100만원 이상이 지출됐음에도 불구, 자세한 내역을 밝히지 않아 고가의 화환이라는 의문을 낳고 있다.
또 소속직원들의 생일케익 비용으로 월 평균 200만원 이상이 업무추진비에서 지출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환경부 장차관은 장관이 화환을 보내고 차관이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부 장관은 유관기관과 직원들의 경조사에 12만원 상당의 화환을 보내고 있다. 또 화환 비용으로 한 달 평균 1000만원의 업무추진비의 20%를 쓰고 있다.
환경부장관은 화환, 차관은 봉투?
환경부 장차관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보면 차관은 화환 대신 돈으로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장관의 화환비용을 지출한 날짜에 차관의 경조사비도 1건당 10만원씩 함께 나간 것으로 확인되는 등 장차관이 한곳에 이중으로 경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는 의혹으로 사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제기하고 있는 업무추진비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가운데 투명성까지 의혹을 받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부부처의 투명하지 않은 업무추진비 공개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 국가기관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매년 지방자치단체의 업무추진비 내역이 시민사회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자세한 내역을 자발적으로 공개하거나 의혹을 살만한 부분의 지출 항목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 한 관계자는 “장차관들의 업무추진비를 훈령에 따라 공개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며 “부족한 공개행태가 시민들의 의혹을 낳을 수는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