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남북정상회담 1] 완전한 비핵화 의지 확인

2018-04-27     오두환 기자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당일치기 남북정상회담이 막을 내렸다. 11년 만에 남북정상이 맞잡은 손을 보며 국민들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의구심이 교차하는 하루를 보냈다.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7일 방문한 판문점 평화의 집 방명록에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적었다. 이에 화답하듯 문재인 대통령은 오전 정상회담 마무리 발언에서 김 위원장에게 “오늘 아주 좋은 논의를 많이 이뤄서 남북 국민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아주 큰 선물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앞선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이 남겨준 교훈이 있다. 아무리 좋은 합의도 훌륭한 계획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실천 의지가 없다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천안함 침몰·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남북관계 경색
민족 공동행사,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등 추진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위원장 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 뒤 발표한 6·15공동선언에서 남북은 ‘경제 협력을 통해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고 약속했다. 이어 경의·동해선 등 철도와 도로 연결이 추진되고 2005년 개성공단이 가동되며 남북 경제협력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과 북한의 핵 실험으로 한반도 정세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남북은 정치·사회 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멀어졌다. 지금은 금강산 관광, 남북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등 3대 사업을 비롯한 남북 경협이 사실상 맥이 끊긴 상태다.

그 결과 지난 2015년 27억1400만 달러(2조9000억 원)까지 늘어났던 남북 교역 규모는 지난해 100만 달러(10억7000만 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가 결정적이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이산가족·친척 상봉하기로


지난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합의문은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높였다. 

합의문에 따르면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고 민족공동행사 추진, 국제경기 공동 진출, 8·15 이산가족·친척상봉,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적대행위 전면중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 평화수역화, 5월 장성급 군사회담 개최를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침 합의 재확인, 단계적 군축 실현, 종전 선언 후 평화협정,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합의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이날 남북 두 정상은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며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며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적극 협력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 정상은 합의문을 통해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때 대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했다”며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고 서로의 군사적 신뢰가 실질적으로 구축되는데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또 남북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북측이 취하고 있는 조치들이 의의 있고 중대하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앞으로 자기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데 합의했으며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한 노력도 병행키로 했다.

10·4선언 속 경제교류사업 
재개 가능성 높아


남과 북은 이미 지난 2007년 정상회담 뒤 채택한 ‘10·4 정상공동선언’에서 다수의 경제교류사업에 합의한 바 있는 만큼 판문점 합의문 속 비핵화 의지를 실천시킨다면 남북 경협은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0·4선언에서 남북이 약속한 경제협력사업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공동어로구역, 문산~봉동 철도화물수송, 개성~신의주 철도 및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개최, 백두산 관광 실시 및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등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 북한의 ‘국가경제개발 10개년 전략계획’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는 점도 향후 남북경협의 순항을 기대케 하는 요소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동해권(에너지, 광물자원 벨트)·서해권(철도·산업·물류 벨트)·비무장지대(환경·관광벨트) 등에서 권역별로 남북이 협력하는 ‘H벨트’를 마련해 경제통일을 이룬다는 구상이다. 북한도 2020년까지 신의주~남포~평양을 잇는 서남 방면과 나선~청진~김책의 동북 방면을 양대 축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어 남북 간 연계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최근 정부는 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밝힌 한반도 냉정구조 해체를 위한 ‘베를린 구상’과 지난 2015년 당 대표시절 발표한 집권 비전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기반 마련에 248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남·북·러 가스관 연결, 나진-하산 물류사업 참여, 개성공단 정상화, 수도권-개성-평양-신의주-단동으로 연결되는 서해안 경제협력 벨트 구축, DMZ 생태·평화 안보 관광지구 개발,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 추진 등에 지원된다. 

남북철도 이어 고속철까지
시베리아·중국횡단철도도


경제협력 사업이 빠르게 추진된다면 속도를 낼 수 있는 분야는 철도 분야다. 지난 27일 오전 두 정상은 비공개 정삼회담에서 백두산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고속철도를 언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 백두산을 가본 적이 없다. 중국 쪽으로 백두산 가는 분이 많던데 전 북측을 통해 꼭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오면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교통 때문에 불편드릴 것 같다”며 “우리도 준비해서 문 대통령이 오면 편히 올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앞으로 북측과 철도가 연결되면 남북이 모두 고속철도를 이용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6·15, 10·4 합의문에 담겼는데 11년 세월 동안 실천하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완전히 달라져 그 맥이 끊어진 것이 한스럽다”고 말했다.

북한의 철도망이 우리 기업들에게 개방된다면 그동안 지리적으로 고립됐던 우리나라 물류도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을 전망이다. 특히 오랫동안 논의된 나진-핫산 프로젝트를 넘어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을 직접 연결하게 되면 철도물류혁명도 가능하다는 것이 물류업계 측 입장이다. 

즉 부산에서 출발해 북한을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상으로 물류를 운송할 경우 최소 45~50일 걸릴 수 있지만 육로를 통한 물류 수송이 본격화될 경우 운송시간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 수 있다. 

북한의 나진항은 물론 부산항 등에서 하역한 컨테이너를 철도에 실어 유럽과 CIS지역으로 운송할 경우 물류에 소요되는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남북철도 연결과 관련해서는 지난 3월 13일 이미 오영식 코레일 사장 “10여 년 전에 이미 경의선이 운행된 경험이 있어 준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오 사장은 “국회와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의제로 남북철도 연결문제를 공론화시켜준다면 좋겠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이산가족을 싣고 남북한을 오가는 철도를 운행하는 데 문제가 없다”면서 “철도를 통한 남북교류는 물론 한반도 물류수송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농업 분야 교류 가능성 ↑
인도주의·전략적 대가 가능


철도 분야 외에 농업 분야도 교류가 활성화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남과 북은 10년 넘게 대북 식량(쌀)이 중단된 상태다. 

그동안 쌀은 경색된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열쇠이자 관계를 진전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해 왔다. 식량이 가지는 인도주의와 주는 입장에서의 전략적 대가를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다.

쌀이 남북 관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4년이다. 당시 수혜를 본 쪽은 북한이 아닌 남한이다. 

그해 8월 31일부터 4일간 남쪽에서 발생한 홍수로 190명이 생명을 잃고 35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북측은 조선적십자회 명의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 석(72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의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1년 전 미얀마 버마에서 북한이 행한 아웅산 테러에도 북측 제의을 전격 수용했고, 물자가 인천항과 북평(동해)항으로 들어왔다. 북한 쌀은 수해 지역 주민들에게 33~66㎏ 분배됐다. 

이듬해인 1985년에 1973년 이후 중단됐던 남북 적십자회담 본회담이 재개됐다. 그해 9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남북 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됐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북측의 전략적 지원에 이용당하게 될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남측이 수용함으로써 남북 관계의 문을 여는 구실이 된 것이다. 

2000년 첫 대북 식량차관 제공은 남북 관계의 촉진제가 됐다. 쌀 30만t과 옥수수 20만t 지원을 시작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연간 40만~50만t의 쌀을 북한에 보냈다. 

쌀 북송은 10년 거치 20년 분할상환에 연리 1%의 조건으로 남북 간 계약이 이뤄진 것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인도적 지원이 아니었다. 이는 개성공단 조성과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 등 경제협력(경협) 사업의 진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가한 5·24 대북 제재조치로 남북 교역이 중단됐고, 쌀 지원도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