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 위조됐다” vs “경영권 뺏으려는 의도” 형제간 공방전 치열

2006-01-04     조경호 
한진그룹 2세들이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의 유산을 놓고 법정분쟁을 벌이고 있다.조남호, 조정호는 소장에서 “정석기업 7만 주는 아버지인 조중훈 전회장이 차명으로 작은 아버지인 조중건 전부회장과 외삼촌 김성배(한진관광 고문)에게 맡긴 것”이라고 주장하며 “2년 전에 유산 상속을 논의할 때 큰 형인 조양호 현 대한항공 회장이 2003년 말까지 자신들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하고 약속을 했는데 아직까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손해 배상액 3억4천만 원도 함께 청구했다. 재계에서는 이번 송사가 경영권이나 재산권 분쟁이라기보다는 창업자의 사후에 그 동안 누적된 형제간의 불신과 갈등이 터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네 형제는 그 동안 아버지 기일을 음력·양력으로 지키는 방법이나, 또 나머지 형제들이 대한항공을 이용할 때 편의제공 문제까지 사소한 문제부터 적지 않은 갈등을 빚어 왔다.향후 법정소송을 통해 벌어지게 될 유언장 조작 의혹을 비롯하여 경영권 분쟁설, 한진해운 분가설 등을 심층 취재했다.지난 12월 26일 조남호, 조정호 회장이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맏형인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법정소송을 제기, 그동안 잠복해 있던 4형제 간 반목과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석기업은 서울 중구 해운센터 빌딩과 인천, 부산 등지에 3개의 빌딩을 관리하는 등 부동산임대업을 주로 하고 있는 회사로, 자본금은 104억원이며, 올해 매출액도 249억원을 기록했다. 장외거래가 거의 없는 비상장 기업이어서 재계에서는 정석기업의 시가를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액면가보다는 훨씬 높다고 보고 있다.그렇다 하더라도 정석기업 7만 주의 재산 가치는 재벌가 기준에서 보면 큰돈이 아니기 때문에 재산분쟁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의 불만과 억울함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는 비상장기업인 정석기업의 소량 주식을 요구한 민사 소송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체 유산으로 확대되거나 소송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남호, 조정호 회장은 소장에서 유언장 조작설까지 제기하고 있어 검증 여부에 따라 파장이 확대될 전망이다.

고 조중훈 회장 유언장은 진짜 위조됐나

조남호, 조정호는 고 조중훈 회장의 유언장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조중훈 전회장은 오랜 투병생활 끝에 지난 2002년 11월 17일 타계했다.이로부터 한 달 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장기간 혼수상태에서 끝내 사망한 조 전회장이 사망 15시간 전인 16일 밤 9시께 대한항공 직원에게 유언 내용을 말하고, 이를 직원이 적었다는 유언장을 공개했다.유언 내용은 조 전회장의 재산 대부분을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가지고 있는 인하학원과 대한항공 쪽에 넘기라는 것.유언장 공개후 조남호, 조정호 회장은 “16일 밤 9시부터 12시까지 부친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유언장 작성을 위해 병원을 방문한 대한항공 직원은 보지 못했다”고 반박하며 “조 전회장이 사망 직전까지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유언을 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언장이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유언장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한진그룹 조씨 형제들은 유산 배분을 둘러싸고 외부로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2003년 1월 합의안을 만든다.합의안 내용의 골자는 형제간 사업 분할과 계열분리, 그리고 잔여재산에 대해선 공동 상속인인 2세들이 법정 상속분에 따라 분배한다는 원칙을 정했다.또 같은 해 5월, 그룹 비상장회사인 정석기업의 주식배분에 대해 조 전회장의 동생 조중건과 처남인 김성배 이름으로 돼 있는 정석기업의 주식 4만9,000여 주와 2만여 주를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2003년 말까지 조남호와 조정호에게 이전키로 합의한다.이 같은 조씨 형제들 사이의 합의는 3년 만에 ‘법정 분쟁’으로 옮겨갔다. 조남호, 조정호가 조중건, 김성배 이름으로 된 정석기업 주식 배분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한 것.

한진그룹 관계자는 “조남호, 조정호 회장측이 요구한 정석기업 주식은 고 조중훈 전회장의 차명주식이 아니다. 선대회장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아 소유하고 있는 조중건, 김성배 두 분의 개인 주식이다. 개인의 소유 재산인 만큼 주식배분은 힘든 상황이다. 금전적인 방법 등을 포함해 다른 방식으로 합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사태 수습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그러나 조남호, 조정호 회장 측의 입장은 단호하다. 한진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오랜 숙고 끝에 소송을 제기한 만큼 법정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액면가 5,000원인 정석기업 주식 6만9,000주는 아무리 비싸게 평가하더라도 수십억원에서 백억원 미만에 불과하다. 두 분이 이 정도의 돈 때문에 소송을 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형제간의 갈등…진짜 속사정 따로 있나?

한진가의 형제간 갈등은 조중훈 회장 타계 후 재산 배분 때부터 불거져 나왔다.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한진 주력계열사인 대한항공을 상속받았고, 3남인 조수호 회장도 알짜기업인 한진해운을 상속 받았다.여기에 반해 조남호 회장의 한진중공업과 조정호 회장의 메리츠증권의 주가총액은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에 비해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유산을 받았다. 이때부터 조남호, 조정호 회장의 불만이 시작되었다는 것. 형제간의 갈등은 고 조중훈 회장의 기일을 두고 음력과 양력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는 문제로까지 번졌다. 장남인 조양호 회장과 3남인 조수호 회장, 차남인 조남호 회장과 4남 조정호 회장이 각각 음력과 양력으로 기일을 나눠 기제(忌祭)를 지내고 있다.경영진 개인적인 관계가 각자 기업의 경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한항공이 2003년 말 조정호 회장이 경영하는 동양화재(현 메리츠화제)와 약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운송보험 계약을 해지하고 영국 로이드 보험회사로 거래처를 옮긴데 이어 지난해엔 조남호 회장 소유의 한일CC 골프장에서 대한항공 광고판을 모두 철수했다.한진해운도 동양화재와 보험 계약을 일부 해지하고 다른 국내 보험사와 신규 계약을 맺었다.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이 주요 고객이었던 메리츠화재는 두 회사가 경쟁 보험사로 거래처를 옮겨갔다.반대로 메리츠화재의 계열사 한불종합금융은 한진그룹 소유의 해운센터빌딩에서 방을 빼 파이낸스빌딩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재계에선 “보통 분가를 통해 계열 분리를 한 기업들은 기업간 암묵적으로 서로 도와가며 경영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진가 형제들이 취한 지난 2년간 거래 관계 행태를 보면 이례적이고 냉정하다”면서 “이들 4형제는 서로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물류기업인 ‘조양호(장남)+조수호 회장(3남)’과 비물류기업인 ‘조남호(2남)+조정호 회장(4남)’으로 편이 갈려 공동보조 경영방식을 취해 왔다”고 분석했다.

조양호 제외 조남호, 조수호, 조정호 연대

‘조양호+조수호’로 이어지던 두 사람의 연대가 깨지고, 조양호 대 조남호, 조수호, 조정호간의 삼자연대설이 불거져 나온다. 조양호 회장과 공동보조를 맞춰온 조수호 회장의 한진해운이 거래 관계를 일부 단절했던 메리츠화재와 다시 계약을 최근 맺자 재계에선 경영권 분쟁과 관련 삼자연대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진해운의 순익이 대한항공을 앞지르며 한진그룹의 ‘핵심기업’이 한진해운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 11월 15일 한진그룹에 따르면 지난 3·4분기까지 한진해운이 매출 4조4,078억원에 3,899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고, 대한항공은 매출 5조6,027억원에 1,710억원의 이익을 냈다고 밝혔다.매출은 대한항공이 앞서지만 당기순이익은 한진해운이 많다. 당기순이익뿐만 아니라 경상이익과 영업이익 또한 한진해운이 대한항공을 앞서고 있다.

한진그룹은 알짜회사인 한진해운이 분가할 경우 경영적 측면에서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라는 분석에 따라 상호 지급보증 해소나 지분정리 작업 등 분가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현재 한진해운의 주요 주주는 조수호 회장 6.87%,대한항공 6.25%,(주)한진 0.48%, 한국공항 4.01% 등.(주)한진과 한국공항이 대한항공 계열사임을 감안하면 조양호 회장측이 10.74% 로 한진해운의 자사주(10.40%)를 제외하면 사실상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조양호 회장은 지난달 (주)한진 창립 60주년 행사에서 “더 이상의 계열분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한진해운은 실질적으로 분리돼 있으나 법적으로는 한 그룹의 회사이고 현체제 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이는 한진해운을 계속 지배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다.한진그룹이 한진중공업과 메리츠증권을 계열분리 한 뒤에도 왜 한진해운을 그룹지배권에 두고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진그룹측에선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은 항공과 선박을 대표하는 회사로서 ‘종합물류기업’이라는 지향하는 방향이 같다. 항공과 해운이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해야 시너지효과가 발생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한진그룹의 경영 비전에 대해 일부 다른 시선도 있다. 한진해운 조수호 회장이 슬하에 딸만 둘인 점을 감안하여 계열 분리 작업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의혹이다.재계 일부에선 한진그룹이 한진해운 분가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조수호 회장이 조남호, 조정호 회장 편에 붙어 회사를 분가하겠다는 의지라는 시각도 있다. 때문에 이번 갈등을 단순히 2남, 4남과 장남 간 갈등으로만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정석기업은 (주)한진의 지배 주주

정석기업은 (주)한진의 주식 14.14%를 소유한 최대 지배주주. 한진은 그룹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지분 9.43%를 소유, 조양호 회장에 이어 2대 주주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상태. 따라서 정석기업 경영권만 확보하면 그룹의 경영권을 지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석기업에 대한 주식 분배 소송은 곧 경영권 분쟁 신호탄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석기업의 지분 구조를 보면 경영권 분쟁해결이 쉽지 않다. 현재 조양호 회장이 지분 25%, 대한항공이 지분 24.4%를 갖고 있고, 조중건(고 조중훈 전회장 동생)과 김성배(고 조중훈 전회장 처남)도 정석기업 지분 10% 남짓을 소유하고 있다.

이번에 소송을 낸 조남호, 조정호 형제의 지분은 하나도 없다. 지분이 하나도 없는 조남호, 조정호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 나설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조남호, 조정호 회장측이 정석기업의 경영상의 상징성을 감안해 주식분배 소송을 제기했다는 분석이다.현재는 민사 소송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체 유산으로 확대되거나 형사소송으로 비화되어 한진그룹 전체의 경영권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소송의 결과에 따라 파장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