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횡포인가? 정상적 계약인가?
2006-11-23 박혁진
정신산업은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관련 물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었다. 98년에는 기업은행이 선정하는 ‘우량중소기업’에도 선정됐으며 회사 사장이었던 이인애씨는 ‘촉망받는 여성CEO’란 간판으로 여러차례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잘 나가던 기업’이었다. 그러던 정신산업이 2000년에 갑작스레 부도가 났다.
1차 부도 때 막지 못했던 돈은 6,000만원. 평소 높은 신용도로 수 억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대출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기업이 6,000만원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난 것이었다. 성장일로에 있었던 ‘우량기업’이 불과 2년 사이에 공중분해된 셈이다. 도대체 1999년과 2000년에 정신산업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걸까?
▶ 99년과 2000년에 무슨 일이?
정신산업은 1999년 7월 26일(계약서상 6월 30일) 현대정공과 오스트리아에 수출할 화물열차에 부착될 리프팅 장치를 만들어주는 하도급 계약을 체결했다.
1화차(unit)당 1,080만원씩 300unit을 납품하기로 하고 총 29억원의 금액으로 계약을 맺었다.
6월 30일자로 작성된 계약서 상에는 계약주체가 현대정공의 박정인 대표이사(현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와 정신산업 이인애 사장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 박정인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계약을 맺었던 현대정공의 철도사업부가 7월 1일부로 (주)한국철도차량으로 넘어가게 됐다. 당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대우,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사업부분과 통합해 (주)한국철도차량으로 바뀐 것. 한국철도차량은 현재 로템으로 상호가 변경됐으며 현대자동차가 50%가 넘는 지분을 갖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다. 당시 정신산업과 거래를 주도하던 직원들도 한국철도차량 소속이 됐다.
그러나 정신산업 입장에서는 불과 하루만에 계약 회사가 바뀐셈이 됐다. (이씨는 실제 계약이 이뤄진 것은 7월 26일이며 계약서상의 날짜 6월 30일은 현대정공의 요구에 의해 바꿔 표기했다고 주장.)
최초 두 회사간 논의했던 거래금액은 1unit당 1,490만원. 정신산업 측은 “1,080만원의 금액으로는 단가를 맞출 수 없다”며 계약체결을 꺼려했다.
그러자 정신산업은 추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수주한 300unit을 더 주겠다는 전 현대정공 직원(당시 한국철도차량 직원)들의 말을 믿고 대당 1,080만원의 금액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납품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설계도면 변경이 있었고 이로 인한 손실액이 발생한 것.
예상치도 못했던 손실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정신산업은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2000년 3월 14일 12억9,000만원의 중간정산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씨는 “로템 측이 납품이 끝나면 주겠다며 정산을 미뤘다”며 “이 말을 믿고 약속된 날짜까지 모두 납품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씨는 제 날짜에 수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데다 받기로 한 원계약금을 넘어선 비용을 정신산업 측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정신산업은 7월 15일 6,000만원을 막지 못해 1차 부도 처리됐으며 8월 19일에 최종 부도처리됐다.
정신산업 측은 “7월 15일 로템 측이 6,000만원을 결제해주기로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그런 약속만 하지 않았어도 회사 신용이 나쁘지 않아 그 정도는 은행 측에서 대출받아 막을 수 있었는데 로템 측 말만 믿고있다 1차 부도가 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 54억을 둘러싼 진실게임
정신산업과 로템의 분쟁은 진실게임 양상을 띠고 있다. 계약일자나 손실금액, 설계변경 등 계약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현재 서로의 주장이 워낙 팽팽히 맞서고 있어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정신산업의 이인애 사장은 로템 측에서 54억 3,000만원을 자신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씨가 주장하는 금액의 산정근거는 총 3가지다. 하나는 계약서 작성시 “수주를 약속했다”는 300unit에 대한 비용 23억 9,100만원. 다른 하나는 중간에 설계변경으로 인해 물품을 다시 납품하는 과정에서 난 손해비용 28억 8,900만원. 마지막은 설계변경 대가로 K모씨를 비롯한 4명에게 준 1억 5,000만원이다. 그러나 로템 측은 이것에 대한 어떠한 법률적 근거도 없다며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
가장 초점이 되는 부분은 정신산업이 추가로 수주하기로한 화차300량분이 양측간의 합의가 됐었던 조건이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정신산업 이인애 사장은 “초기 논의되던 금액이 1화차당 1,480만원이었는데 1,080만원으로 계약한 것은 현대정공 측이 300량의 추가수주를 약속했기 때문”이라며 “그 조건만 아니었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현대정공이 언급한 ‘추가 300량’이 정신산업입장에서는 일종의 ‘이브의 유혹’이 됐다는 것.
로템 측의 설명은 이와 다르다. 300량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300+α’라는 것. 로템 관계자는 “추가로 발주하기로 했던 300량은 옵션이었다”며 “무조건 발주를 약속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추가로 300량을 수주받을시에 발주한다는 것이 계약서에 나와있다”며 “그러나 우리도 오스트리아에서 수주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만들지도 않은 차량에 대한 비용마저 지불하라는 것은 억지 주장이라는 것이 로템 측의 주장이다.
설계변경에 대한 부분도 엇갈리고 있다. 이씨 측은 “정신산업은 현대정공 측이 준비한 설계도면대로 리프팅장치를 만들어 제 납기일에 납품을 마쳤으나 설계도면에 하자가 있단 이유로 현대정공 측은 7~8 차례의 설계변경을 요구했다”며 “이로 인해 이미 만든 리프팅 장치를 폐기하고 새로 제작해야 하는 일이 이어졌고, 그 결과 28억 8,900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현대정공은 ‘설계변경으로 인해 발생한 추가비용은 나중에 모두 정산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납품이 완료되자 이 추가비용에 대한 결제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로템 측은 “정신산업이 제대로 만든 리프팅 장치는 몇 개 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실비로 정산해 줬다”며 “또한 나중에 이인애씨로부터 추가 비용 발생이나 추가 가격 인상은 없다는 내용의 확약서도 받았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씨는 “확약서는 위조된 문서”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외에도 양측을 오고가며 거래를 주도했던 당시 현대정공의 P씨와 양사가 서로 상대방의 직원이었다고 주장하는 K씨 등이 설계변경 대가로 받은 1억 5,000만원에 대한 부분도 양측이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이 수사한바 있으나 현재로서는 이들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번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 물리적 접촉 있었나?
이번 사건은 최근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인애씨와 로템에서 고용한 용역업체 경호직원들간의 물리적 충돌 여부다. 이인애씨는 그 동안 자신이 계약을 맺은 것은 현대정공이지 한국철도차량이 아니라며 현대측과 협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씨는 올 초부터 현대자동차 양재동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펼치며 정몽구 회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씨는 정회장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지난 7월 14일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현대 모비스빌딩에서 박정인 수석부회장을 만났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박 부회장이 이번 일에 대한 긍정적 검토를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씨는 박부회장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판단, 11월 4일부터 분당에 위치한 박 부회장의 집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5일째 시위를 하던 날 새벽 6시경 출근하던 박부회장과 면담을 요청하던 이씨와 이를 말리던 경비용역업체 직원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경찰차와 119 구급대원에 전화를 했으며 병원으로 실려갔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씨는 “4명의 경호직원들이 자신을 사이에 두고 숨을 못 쉴 정도로 강한 압박을 했다”고 묘사했다.
반면 현장에 있었던 로템측 직원은 “이씨가 차도로 뛰어드는 것을 저지했을뿐 어떠한 물리적 압박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현재 이씨는 분당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척추 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측은 보다 정확한 증상과 원인규명을 위해 CT촬영 등을 하고 있다.
로템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법정에서 해결하자’는 입장이다. 이인애 사장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법률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로템측 관계자는 이번 일은 계약서 작성시에 내용을 정확히 검토하지 않은 정신산업 측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로템 측은 이 문제를 대한상사중재회에 중재를 요청해놓은 상태다. 그러나 상사중재회는 어떤 법률적 권한도 없기 때문에 결국 법정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 로템 ‘법대로 하자’
그러나 이씨는 법정으로 끌고가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이씨는 개인이 대기업을 상대로 법정에서 이길 확률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씨의 주장처럼 서류위조부분을 밝혀내기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최초 현대정공과의 계약으로 인해 부도가 났다고 주장하고 있어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공정 하도급 문제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계약을 체결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은 중소기업의 재량에만 맡겨놓은 채, 실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중소기업 책임으로 떠넘기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되고 있어서다. 정신산업과 로템의 분쟁은 대표적 사례로 세간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경제의 대표적 걸림돌로 지적받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거래행위. 이번 사건을 관심있게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