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포퓰리즘’ 오세훈 VS ‘안보보수’ 김문수
보수 세력 끌어안기에 서로 다른 행보
2011-08-16 전수영 기자
[전수영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수도권을 양분하고 있는 도백으로서 항상 언론에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학생활부터 정계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도 전혀 다르고,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또한 매우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정치에 입문했을 당시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상급식을 놓고 ‘전사’로 돌변한 오세훈, 좌파 운동권에서 이승만·박정희를 추앙하는 김문수. 그들의 행보를 비교해 본다.
차기 대권후보군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두 사람, 바로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다. 이 두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길도 다르고, 정치 스타일 또한 다르다.
오 시장은 ‘반포퓰리즘’을 기치로 내세운 반면 김 지사는 ‘안보문제’를 중심으로 정치를 펼쳐나가고 있다.
오 시장은 2012년 대선에 불출마를 선언했고, 김 지사는 아직까지 별다른 속내를 비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이 언젠가는 대통령 후보로 국민들 앞에 설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오 시장과 민주화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철학을 바꿔 보수정당에 몸을 담은 김 지사가 종종 비교되는 이유다.
잠룡(潛龍)인 이 두 사람이 과연 앞으로 어떤 길을 걷다가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인가를 추적해 봤다.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후 ‘반포퓰리즘’ 전사로 변신
오세훈 시장은 1961년 서울 삼양동 판잣집에서 태어나 대일 고등학교를 거쳐 외국어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으나 중간에 고려대 법대에 편입했다.
오 시장은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을 거쳐 1991년 오세훈법률사무소를 개업한다.
그 후 1994년 MBC TV의 <생방송 오 변호사 배 변호사>를 진행하면서 수려한 외모와 함께 알기 쉬운 법률 설명으로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생방송 오 변호사 배 변호사>의 인기를 기반으로 SBS TV의 <뉴스따라잡기>와 SBS 다큐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맡으면서 오 시장의 이지적인 측면도 상당히 부각됐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오 시장의 성공한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대리만족과 함께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가망성으로 인식하게 된다.
오 시장은 방송활동과 함께 시민사회운동, 특히 환경 분야에서 직접 활동한다. 환경운동연합 법률상담실장 겸 상임 집행위원, 서울시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감사를 역임하며 제도권 밖에서의 시민활동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인권단체로 널리 알려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환경위원도 맡아 환경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계속해서 실천해 나갔다.
당연히 시민들의 반응은 오 시장에게 우호적이었다. 소위 ‘배운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해 나가는 모습에 큰 반향이 일었고 이를 계기로 오 시장은 2000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서울 강남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16대 국회에 입성한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오 시장은 여전히 환경운동 분야와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자문위원을 맡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지속적으로 개혁적인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가 한나라당에 입당해 의원이 되긴 했지만 그의 선택을 놓고 비난의 여론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내부에서 당을 개혁할 수 있는 소장파 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오 시장은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시민단체 우수의원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의정활동에도 충실했다.
의정활동으로도 주목을 받았던 오 시장이지만, 오 시장이 더욱 빛을 발한 것은 다름 아닌 정치관련 3법을 개정하는 이른바 ‘오세훈법’ 발의라고 할 수 있다.
정당의 지구당 폐지를 골자로 하는 정당법과 돈 안 드는 선거문화의 정착을 위한 공직선거법, 기업의 정치자금 후원을 금지한 정치자금법이 그것이다.
특히 정치자금법의 경우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졌던 기업과 단체의 정당과 국회의원에 대한 기부를 제한함으로써 이른바 ‘검은 돈’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오세훈법’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대한민국 정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후 오 시장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 선언을 하는 깜짝쇼를 보여줬고,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 열린우리당의 강금실 후보를 누르고 시장에 당선된다.
오 시장은 취임 이후 한강르네상스 사업, 용산국제업무지구 지정, 뉴타운 사업을 시행해 나갔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이런 오 시장의 정책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업 중단을 요구했지만 오 시장은 이를 무시하고 사업들을 밀어붙였다.
오 시장은 민선4기 말기부터 제기된 무상급식을 놓고 서울시의회·서울시교육청과 갈등을 벌이면서 반포퓰리즘 전사로 변신했다. 특히, 24일 실시되는 주민투표를 두고는 2012년 대선 출마 포기까지 선언하며 포퓰리즘 반대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2012년 유력한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이었던 오 시장의 대선 출마 포기 선언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주민투표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자신의 출마 포기 선언으로 33.3%에 못 미칠 가능성이 있는 주민투표에 불을 지핌과 동시에 분열된 보수 세력의 결집을 주도하고 있다. 오 시장은 이번 발표로 2012년 대권의 꿈은 잠시 접었지만 국민들에게 ‘반포퓰리즘’ 전사의 모습을 제대로 각인시키며 변함없이 차차기 대권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김문수, 안보를 중심에 두고 색깔빼기에 역점
김 지사는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김 지사 삶의 3분의 2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왔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인 김 지사는 1970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학년 때인 1971년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와 관련해 제적당한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 지사는 4H운동과 야학 등의 농민운동을 펼쳤다. 그 후 다시 학교에 재입학했으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다시 제적된다.
재적 이후 김 지사는 청계천 피복 공장 재단보조공으로 근무하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1977년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에 오르게 된다. 이른바 ‘학출(학생출신의 줄임말)’에서 노동운동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런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80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후 구속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으나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던 김 지사는 1990년 창당된 민중당의 주역으로 참여해 노동위원장을 맡게 된다. 민중당에는 김 지사를 비롯해 김낙중, 이재오, 노회찬, 심상정 등과 현재 국회의원인 차명진 의원, 민중당 당시부터 김 지사를 보좌해 온 임해규 의원이 있었다.
면면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당시 진보세력의 활동가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992년 치러진 총선 패배 후 민중당은 결국 해체되고 만다.
이후 김 지사는 택시운전을 하면서 야인생활을 하다가 1994년 갑자기 민주자유당에 입당한다. 그야말로 놀랄 일이었다.
노동운동을 계속해오던 좌파인 그가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으며, 동지들은 그동안 자신들과 함께했던 김 지사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물론 그가 위장으로 민자당에 입당했을 것이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인사도 있었다.
김 지사는 자신이 보수정당인 민자당에 입당한 계기를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도 좌파 출신인 것처럼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념과 사상이 바뀌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뉴라이트’로 규정했다.
그런 김 지사는 1996년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의 공천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된다. 개혁을 꿈꾸던 이가 보수정당에 편입돼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국회의원이 된 김 지사는 상임위로 환경노동위원회를 선택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경험을 살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보에 대한 정책들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김 지사는 북한인권 문제, 납북자·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 등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이며 이전까지의 삶에 대한 색을 지우고자 노력했다.
국회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가장 의정활동을 잘하고 있는 정치인으로 꼽힐 정도로 의정활동에 충실했던 김 지사는 부천 소사구에서 내리 3선을 하고는 2006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열린우리당의 진대제 후보를 꺾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당선 이후 김 지사는 국회의원 시절 강조했던 안보 문제를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경기도 일부 지역은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안보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김 지사는 올해 초 ‘통일 강대국 대한민국을 만들자’라는 주제의 특강에서 지난해 말 김포 애기봉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과 관련해 얘기를 꺼냈다.
김 지사는 “지난 연말 김포 애기봉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에 참석했던 것은 북한이 포탄을 발사하면 한번 맞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애기봉뿐 아니라 통일전망대, DMZ 모든 철조망에도 불을 밝히자고 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직후 일어났던 촛불시위와 관련해서는 “진짜 민주화를 하려면 MB독재 이야기하기 전에 김정일 독재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지사의 보수색 강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김 지사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신이 진정한 보수주의자임을 내세우고 있다.
김 지사는 지난달 14일 경상북도 구미 상모동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참배한 자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나라 발전에 이바지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같은달 18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서해안 시대의 동반자 경기-인천’을 주제로 한 특강에서 김 지사는 “서울 시내에 세워진 역사적인 인물 동상은 왜 이순신과 세종대왕뿐인가. 이승만 대통령 동상도 하나 세워야 한다. 그들은 기적의 대한민국 60년을 이끈 주인공들이다”라며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하면된다’ 정신의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김 지사의 좌파 색깔빼기와 안보 첨병으로서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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