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문재인 팬덤②] 광신도, 비평가? 양날의 검
열성이 과하면 광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2018-01-19 오두환 기자
‘팬덤의 딜레마’ 착하고 좋은 팬들만 기대할 수 없어
“나는 가장 깨어 있고 냉정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한다”
‘팬덤(fandom)’은 ‘광신자’를 뜻하는 ‘패너틱(fanatic)’과 ‘나라’를 의미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다. 오래전부터 연예계에서는 흔하게 사용되던 용어지만 최근에는 정치권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팬덤의 기본은 ‘열성’이다. 이 열성이 과하면 광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정치색을 띠면 자칫 테러로까지 변형된다.
정치권에서 본격적인 팬덤현상이 생겨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0년대에 출범한 ‘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노사모)’이 정치인 팬덤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당시 노사모는 정당조직의 개입이 없는 순수한 팬클럽이었다.
소비자에서 공동 생산자로
그리고 지혜로운 비평가로
팬덤의 시작이 연예인이었던 만큼 정치인의 팬덤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예인들의 팬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6년 4월 10일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가 국내 한 일간지에 ‘연예인 팬덤, 정치인 팬덤’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칼럼에서 윤 교수는 “1990년대 말, 인기 걸그룹 베이비복스 멤버 하나가 동시대 아이돌 그룹인 H.O.T 멤버와 사귄다는 소문 때문에 안티팬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시달렸다. 객석을 점거한 후 시종일관 야유만 하는 것 정도는 점잖은 편이었고, 면도칼 테러 시도나 우편물을 통한 협박도 끊이지 않았다. 루머의 주인공이었던 멤버는 한동안 경찰의 호위를 받아야 할 정도였고, 예기치 못했던 사태에 H.O.T 멤버들도 당혹했다”며 팬덤 문화의 부정적인 사례를 소개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중가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은 ‘영혼 없는 자동인형’으로 불렸다. 그래서 학술적으로 팬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다며 그 고정관념을 깬 학자가 헨리 젠킨스라고 소개했다.
젠키스는 ‘팬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공동 생산자’로 봤다.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노래, 장식물을 만들고 더 나아가 노래나 드라마를 능동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기도 한다는 뜻이었다.
윤 교수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팬의 의미가 “대중문화 산업이 던져주는 먹잇감을 무비판적으로 먹어치우는 바보”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서사를 재목적화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그리고 종종 지혜로운 비평가”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도가 지나칠 경우다.
윤 교수는 “스토커 수준으로 연예인을 쫓아다니고, 사생활 침해나 주거침입 등 범법행위로까지 이어지는 소위 ‘사생팬’들을 ‘지혜로운 비평가’로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동시에 이들 때문에 모든 팬 활동을 금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기적이거나 악의적인, 나아가 반사회적인 일부 유권자들 때문에 선거제도를 없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팬덤의 딜레마다. 착하고 좋은 팬들만 기대할 수도 없고, 팬들을 교육하거나 계몽하려는 생각은 더 부질없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문빠·안빠·박빠 등 이른바 정치인들의 팬덤에 대해 “자신이야말로 정치적으로 가장 깨어 있고,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냉정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한다고 믿는 이들”이라고 지적했다.
칼럼에서 윤 교수는 정치인 팬덤을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 비교했다. 그는 “인류 첫 팬덤이 종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며 오늘날 정치인 팬덤의 행동을 “다른 우상을 섬겨서도 안 되며, 다른 누군가가 나의 스타를 폄훼하는 것도 참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타 연예인은, 그리고 스타 정치인은 유일신으로 재탄생한다”고 꼬집었다.
젠킨스와 윤태진 교수는 팬들의 능동성을 주목했다. 그래서 윤 교수는 “서태지의 팬들이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성장에 기여했듯이 열성적인 정치인 팬덤도 한국 정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윤 교수는 “정치인이 팬덤의 대상이 되는 것은 21세기의 불가피한 현상이라 하더라도,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라며 “더구나 정치인이 교주를 자임하거나 교주놀이를 즐기는 수준까지 가버리면, 우리나라의 불행한 정치지형은 정치학자도 대중문화학자도 아닌 종교학자가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무비판적인 팬덤 현상과 정치인들의 연예인화를 경계할 것을 경고했다.
아군 적군 가리지 않는
댓글 공격 “큰 부담”
한번 불붙은 팬덤현상은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다. 앞서 윤태진 교수가 지적했듯이 팬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곤란한 일을 겪는 일이 생긴다 해도 그것을 자신들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팬들도 많지 않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팬덤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인 양정철 전 비서관도 이에 대해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양 전 비서관은 최근 출간한 ‘세상을 바꾸는 언어’라는 책에서 일부 극성 지지자들에 대해 “미안한 얘기지만 한편으로는 큰 부담이었다”라고 고백했다. 또 그는 “문 대통령도 온라인 토론과 댓글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데 고민이 깊었다”고 회고했다.
실제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팬들의 과도한 정치적 성향은 때때로 대통령을 곤경에 빠트리곤 했다. 이른바 문빠들에게 문 대통령은 성역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정치인이 대통령을 공격한다면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댓글공격을 퍼붓기도 한다. 이들은 단체로 해당 정치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방문해 비판적인 댓글을 달거나 부정적인 기사를 쓴 언론사 홈페이지 기사에 댓글을 다는 식의 전략을 구사한다.
극렬 팬 활동
대통령 구설 오른다
강력한 팬덤을 갖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극렬한 팬들의 활동으로 종종 구설에 올랐다. 하지만 대부분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문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면 부정적인 댓글이 무수히 달린다며 대통령의 생각을 묻는 질문을 던졌다.
이 기자회견은 생방송 중이었고 문빠들의 극렬한 활동으로 해당 질문을 했던 기자는 인터넷 상에서 ‘산상털기’ 수준의 공격을 당했다.
국민의당은 즉각 정치 공세에 나섰다. 같은 날 국민의당은 청와대에서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과 극렬 지지자들의 인식 전환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논평을 발표했다.
김형구 부대변인은 이날 오후 논평을 통해 “비뚤어진 팬덤문화에 대한 문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에 유감을 표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부대변인은 이어 “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이 또 한 명의 기자를 ‘기레기’로 전락시키고 지난 대선 때 맹위를 떨치던 소위 양념부대의 집중 공격을 받게 만들었다”며 “기자는 격한 표현을 일삼는 극렬 지지자들의 행동에 대한 생각과 전할 말씀이 있는지 대통령에게 물었다. 이들에게 자제를 당부해 달라는 애교 섞인 질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문 대통령은 극렬 팬덤 문화는 나무라지 않고 기자들이 익숙하지 않아 그런 것이라며 기자 탓으로 돌렸다. 또 예민할 필요 없이 담담하게 대하라며 훈계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기자는 온라인에서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고 민주당 전직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공격을 선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부연했다.
김 부대변인은 “자기들이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르고 반성하지 않는 극렬 지지자들의 행태가 참으로 개탄스럽다”며 “또 건전한 비판조차 용납하지 않는 비뚤어진 팬덤 문화를 감싸고 즐기는 듯한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도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부대변인은 그러면서 “일부 지지자들의 도를 넘는 공격적 언행은 반민주의며 결코 문재인 대통령 성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정치인 팬덤 현상의 등장으로 우리나라 정치가 한 단계 발전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팬덤이 단순한 사생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정치 선진국은 요원한 얘기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