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열의사 납북직전 일본활동 사진 국내최초 공개

2006-09-08      
아나키스트로서 ‘일왕부자’ 암살 기도 등 다양한 활동 펼쳐
북에서 생마감…독립기념관, ‘8월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


일왕 부자의 암살을 기도하는 등 조선인의 기개를 드높이고 민족적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던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가 1950년 북한으로 납북되기 직전 일본에서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이 사진은 박 의사가 광복 후 어렵게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생활 조건 개선활동을 위해 재일거류민단장을 역임했을 때 비서였던 고 박성진씨의 아들인 박신충씨와 재일교포 영화감독인 오덕수씨가 소장해 오던 것으로 지난달 일본에서 사진을 입수한 경북 문경시 마성면의 박정순(72)씨가 경북매일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개했다.

박씨에 따르면 이 사진은 박 의사가 1945년 10월27일 아끼다 형무소에서 출옥 후 재일 한인 집에 잠시 머물면서 몸을 추슬렀을 당시 찍은 것이며 맨 가운데가 박열 의사, 뒷줄에 서 있는 사람이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덕수 영화감독의 선친이다. 오 감독은 이 사진을 지난달 박씨에게 제공했다. 또 한장의 사진은 1947년 10월 25일 일본 동경에서 박열 의사가 임시정부격인 대한국민의회의 주일공사를 개설하고 일본 언론계 지도자들과의 간담회 개최를 기념해 찍은 사진이다.

맨 아래줄 가운데 여성 오른쪽이 박열 의사다. 세 번째 사진은 1974년 박열 의사가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자 그 해 2월 22일 일본 동경청년회관에서 개최된 박열 의사 추도식 모습이다. 박 의사가 재일거류민단장 시절 비서였던 고 박성진씨가 박 의사의 활약을 보고하고 있다. 이 사진도 최초 공개된 것이며 박성진씨의 아들 박신충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박열 의사의 고향동네에 살면서 평생을 박열 의사에 대한 연구와 자료수집에 나서고 있는 박정순씨는 “박 의사가 강제 납북되는 바람에 관련 사진이 거의 없는 실정”이라며 “북한에서의 활동 사진은 북한에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박 의사가 출옥후 일본에서 활동한 사진은 아직 국내에선 공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박열 의사의 부인인 가네코 여사의 묘소는 일본인인데도 남편의 고향땅에 묻혀 있는데, 의사의 묘소는 북한에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이 사진은 문경시가 편찬할 예정인 ‘문경 100년사’에 수록할 예정이며 독립기념관과 서대문역사박물관의 지하 광복관 등에 전시될 예정이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독립기념관은 광복절을 맞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활동한 한인 아나키스트의 활동을 미공개 자료 등 60여점을 통해 보여 주는 ‘방치된 아나키즘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을 8월 15일부터 9월30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관에서 연다.

이 가운데 일본에서 활동한 대표적 한인 아나키스트 박열의 옥중 노트와 출옥 후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 ‘신조선’ 창간호, 신채호가 대만에서 체포돼 취조받은 지룽수상경찰서 터와 취조 내용을 실은 대만일일신문 기사는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라는 것이다. 또 국내 대표적 아나키즘 단체인 관서흑우회와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인사들의 신상기록카드도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자료이며,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함께 간행한 ‘흑도’, ‘후토이센징’, 아나키즘을 소개하는 글을 다수 게재한 ‘개벽’, ‘신생활’ 등 1920년대 초 잡지도 있다.

이 밖에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의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처단 시도, 다물단원의 일제밀정 김달하 처단 시도, 이회영의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처단 시도 등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활동이 소개된다고 한다. 독립기념관은 “그동안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돼 혼란을 조장하는 폭력주의자나 사회주의 아류로 치부된 아나키스트들이 실제로는 조국 독립에 헌신한 활동가들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라며 “전시회는 이들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제자리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아나키스트들은 어느 계열 못지않게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음에도 그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거의 잊혀진 채 방치돼 왔었다”며 “이들의 항일투쟁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재조명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열 의사는 1902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저항 운동을 펼치던 중 일왕부자의 암살을 기도했다.

이로 인해 2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 풀려나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윤봉길, 이봉창 등 열사들의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비롯, 재일거류민단장,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6·25 전쟁으로 인민군들에 의해 강제납북됐다가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쳤다. 부인 가네코 여사는 일본인이면서 일본의 식민통치와 천황제에 항거해 조선인과 연대했다는 점에서 일본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이지만 올해 들어 여사를 추모하기 위해 문경을 찾는 일본인들이 부쩍 늘고 있는 등 이들 부부는 최근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혁명가적 사고를 가진 철학가이자 행동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국가보훈처 및 순국선열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은 ‘8월의 독립운동가’로 박열 의사를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