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가네코 우미코’
2006-04-12 고도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가네코여사는 경북 문경 출신인 박열 의사의 도쿄 유학시절인 1922년에 만나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 박 의사와 동거하던 중 1923년 9월1일 간토(關東)대지진 때 가네코씨는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로 박 의사와 함께 검거돼 1926년 3월25일 둘 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일본 당국은 가네코씨가 그 해 7월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박 의사의 형인 정식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가네코의 시신을 수습해 집안 선영인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했다. 박 의사 집안에서도 가네코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죽은 일본인이 한국에 묻히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남자를 사랑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했던 이력이 있었던 것이다. 가네코씨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은 꾸준히 문경을 방문해 왔고, 특히 3일 문경을 방문한 야마나 현 문인들은 여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박열의사기념관 건립 사업 지원 의사를 밝히기도했다. 일본 입장에서 봤을 때 반역자일 수도 있는 가네코여사를 추모하는 일본인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이날 참배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문경시에서는 지난 2000년 박열의사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전시관 건립, 생가복원 등 추모사업을 펼치면서, 팔령에 있던 여사의 묘소를 지난 2003년 11월 박열의사의 생가 뒤편(마성면 오천리 샘골)에 이장했다.남편 박열의사는 23년간 옥고를 치른 후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윤봉길, 이봉창 등 열사들의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았으며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가 6·25 사변 3일만에 강제납북,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정부는 지난 1989년 박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올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