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읽으며 마음 추스르고 있다”
2003-07-31 김은숙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박지원 전장관에 대한 애정이 가장 각별한 박양수 의원. 3일이 멀다하고 박전장관을 면회하러 다니는 박의원이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씁쓸하다. 지난 7월 24일에도 박의원은 서울구치소에 다녀왔다. 여전히 어두운 표정의 박전실장의 모습을 보며 박의원의 심기도 편치 못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감초기에 비해 식사도 잘하고, 건강에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 변호인이나 박전장관 부인과 함께 면회를 다닌다고 한다. 최근에는 진승현게이트 사건과 관련, 무죄판결을 받은 권노갑 전고문도 면회하러 가 박전장관을 위로했다.
권전고문의 최측근은 “당연히 다녀와야 하는 게 인간적 도리 아니냐”며 박전장관과의 정치적 의리를 강조했다. 박전장관의 면회를 이제 막 마치고 돌아온 박의원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특별히 오고간 얘기가 있는지에 대해 묻자 박의원은 “지금와서 무슨 말을 하겠냐”며 “그냥 서로 안부 묻고 얼굴만 보고 온다”고 말한다. 건강에 이상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처음 수감됐을 때보다 식사도 잘 하고, 적응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편하다”며 “책도 읽고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박의원은 이내 씁쓸한 심경을 밝혔다. 박의원은 “아무래도 그 안에 있으면 힘이 들 것 아니냐”며 “그래도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전장관과 면회를 희망하는 인사들이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는 순서를 기다려 면회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진승현씨로부터 5천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됐지만 무죄판결을 받은 권전고문도 박전장관 면회를 다녀왔다.
권전고문 최측근은 “무죄판결를 받은 후 박전장관을 면회하러 한차례 다녀왔다”며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두 분이니까, 서로 힘들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권전고문과 박전장관은 누가뭐래도 DJ정권의 핵심실세. 두 사람의 정치인생은 DJ로부터 시작되고 DJ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다. 물론 권전고문은 내년 총선을 기점으로 해 정치재개를 모색하고 있긴 하지만, DJ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권전고문이 무죄판결을 받고 가장 먼저 찾아가 오열한 곳도 동교동 DJ 자택. 최근 박전실장의 면회를 다녀온 권전고문은 박전장관의 인간적 의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박전실장을 찾는 정치권 인사들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면회를 가려고 해도 몇날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소연. 여전히 박전실장의 정치적 영향력이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그도그럴것이 그의 구속이 갖는 상징적 의미 때문. 박전장관의 이번 사법처리가 DJ의 영원한 2인자라는 사실을 또 한번 입증해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구속 당시 박전장관은 “앞서 아무 책임도 없는 분들(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을 지칭)이 구속됐는데 내가 구속이 안 되면 말이 안 된다”며 “억울한 점은 없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진다”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그는 햇볕정책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크게 걱정하며, 역사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수감된 이후 박전실장은 DJ의 건강만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신의 충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측근들을 통해 전하며, DJ에 대한 각별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수감되면서 금테안경을 뿔테 안경으로 바꾸고, 대하소설‘태백산맥’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던 그다.박전장관 못지 않게 마음고생이 심한 사람은 다름아닌 그의 부인 이선자씨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면회를 다녀온다는 박전장관의 부인 이씨는 현재 박전장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여의도 H아파트서 혼자 지내고 있다. H아파트 경비 관계자에 따르면 “일하는 사람도 두지 않고 혼자 계신다”며 “소리소문없이 나갔다가 들어오신다”고 전했다. 또 이 관계자는 “특검때는 하루에도 여러명의 기자가 찾아와 집앞에서 기다리곤 했는데 요즘에는 뜸해졌다”며 “종종 기자들이 찾아와 사모님 뵙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되돌려 보낸다”고 말했다. 박전장관 부인 역시 행여 기자들이 찾아올까봐 비교적 늦은 시간에 귀가하고 있다.기자도 두어차례 H아파트를 방문, 부인과의 인터뷰를 원했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경비관계자는 “남편이 저 안에 있는데 부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며 “기자들도 본인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양수 의원도 “지금 누굴 만나 어떤 얘기를 하실 수 있겠냐”며 “같이 면회를 갈 때도 별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라고 전했다.부인 이씨는 얼마전 박전장관을 면회하면서 끝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전장관이 “지난 14년간 제주도 여행한번 못해 너무 미안하다”며 “60 넘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보자”고 말하자 이내 눈물을 보였다고. 부인 이씨는 이희호 여사의 각별한 위로를 받고 있다. 이여사는 부인 이씨를 걱정하며 자주 전화를 한다고 한다.박전장관에게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두 딸이 있다. 하지만 두 딸의 면회는 극구 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딸들에게 수의 입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다. 비교적 구치소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어서 면회를 다녀오는 사람들은 그나마 안심하고 있다. 매일 마신 술 때문에 지난해 장에 이상이 생겨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박전장관은 현재도 약을 복용중이다. 최근에는 서울대 병원에 진단서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전장관은 매일 아침 운동시간에 구치소 운동장을 수십바퀴씩 돌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운동장이 워낙 좁아 1시간에도 1백여바퀴를 훨씬 넘게 돌고 있다고 한다.많은 지인들이 면회를 오지만 그중에도 김대중 전대통령이 1주일에 한번씩 김한정 비서관을 보내 위로를 전해 큰 힘을 얻는다고 한다.수감 당시 읽었던 ‘한강’은 이미 다 읽은 상태. 최근에는 ‘태백산맥’ 전집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한편 박의원은 박전장관을 면회한 후, 나라종금 사건으로 구속수감된 한광옥 전비서실장도 면회하고 왔다고 한다. 한 전실장 역시 건강하다고 전했다. 한 전실장은 오는 8월7일 결심공판이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