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문신구 스크린 속 에로스를 만나다 [7]

<박쥐>는 포르노다?

2009-05-13      기자

“닝기리, 이젠 노골적으로 x대가리까지 다 꺼내놓네. 세상 많이 변했다.”

“별 것 아니드만. 차라리 여자나 더 제대로 보여주는 게 좋겠드만.”

“옛날엔 버스 안내양 잘 못 건드렸다가도 난리굿이었는데, 신부가 사람 죽이고 간통하고 물건 다 내놓고 다녀도, 그 기독교 뭔가 하는 말 많은 단체 xx들도 조용하잖아. 벗는 게 순교면 대한민국 신부들 다 뭐하고 있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놓고 막 영화를 보고나온 듯한 중년 남자들이 술집에 앉아 안주삼아 논쟁을 벌이는 이야기다.

영화 후반부 신부(송강호)가 자신을 따르는 신도를 겁탈하는 장면에서 신체 하부를 완전히 노출해 성기를 드러냈다.

초점은 오로지 송강호의 그 곳으로 영화의 내용 따윈 관심 밖이다. 영화를 배급하는 배급사의 성기 파는 홍보나 물 타기하는 언론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 것이 여론의 속성이다.

십수 년 전이다. 소설을 음란하게 썼다고, 연극 무대에서 여배우가 옷 벗었다는 이유로 마광수 교수와 나를 말도 안 되는 법의 잣대로 인민재판 하듯 파렴치한 범죄로 몰아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었다. 웃기는 일이다. 오늘날이라 달리 없어진 법도 바뀐 법도 없다. 애시 당초 그 딴 법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떻게 작품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사회 풍속 법에 적용을 하냔 말이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코메디다. 작품 속에 간통하면 간통죄로, 사람 죽이는 장면은 살인죄로 다스릴텐가?

영화 속 벗은 몸은 인간 송강호가 아니고 배우 송강호다. 배우 송강호가 벗은 것이 아니라 신부가 벗었고, 신부는 신부가 아니라 작중 인물이고 그 작중 인물은 현실이 아닌 픽션인 가상의 상황을 이루는 하나의 구조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작품속의 살인은 살인이자 살인이 아니며, 모든 사실은 사실이되 손가락질 하고 수갑 채울 일이 아니고 책임 물을 일도 책임 질 일도 아니란 것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배우의 성기 모양이나 크기가 ‘박쥐’가 아니다. 보여 지는 이면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감독이나 연기자의 연기 이면의 의도와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세익스피어는 우리 인생의 옷감은 선과 악의 실로 짜여진 것이라 했다. 원래가 인간은 죄의 본성을 타고났다. 그래서 늘 선악 상악 사이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그런 인간의 본능을 가진 영화 속 신부는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캐릭터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가장 인간적인 고뇌의 기도다.

우리는 늘 고뇌하고 갈등하지만 이래저래 위장하고 포장 할 뿐이다.

오래 전 신학을 하던 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예수님은 몽정을 했을까, 자위를 했을까?”